[에디터 프리즘] 자욱한 포연이 걷히고 나면

중앙선데이

입력 2021.06.26 00:26

지면보기

742호 31면

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정치에디터

우승이 ‘경쟁’이라면 강등은 ‘전쟁’이다. 유럽 축구 중 가장 인기 있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널리 회자되는 말이다. 1·2위 다툼보다 하부 리그로 밀려나지 않으려는 혈투가 훨씬 더 살벌하다는 얘기다. 퇴출과 동시에 마이너 신세로 전락하면서 막대한 중계료 수입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대선도 마찬가지다. 본선이 경쟁이라면 예선은 전쟁이다. 본선에선 설사 지더라도 차기를 도모하거나 야권 지도자로 남아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지만 예선에서 떨어지면 존재감 자체를 위협받기 십상이다. 대권을 꿈꾸는 중견 정치인에게 예선도 통과 못했다는 꼬리표는 치명적이다.

본선보다 예선이 더 사생결단 혈투
결국엔 미래·비전이 승패 가를 것

바둑은 선수(先手)를 잡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고수끼리 맞붙을 경우 후수만 두면서 이기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선이란 단판 승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더욱이 뒤쫓는 자 입장에선 어떻게든 판을 흔들어 선수를 되찾아와야 흐름을 반전시키며 역전의 기회를 노릴 수 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슬로건으로 빌 클린턴 대통령을 당선시킨 당대의 책사 딕 모리스가 승리의 핵심 요소로 ‘내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이슈의 선점’을 꼽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윤석열 X파일’ 공방의 이면에도 대선이란 바둑판에서 선수를 뺏고 뺏기지 않으려는 치열한 물밑 수싸움이 자리 잡고 있다. 추격자들은 선두 주자의 공고한 아성에 드디어 균열이 생겼다며 이참에 확실히 선수를 거머쥘 궁리를 하고 있고, 이에 맞서 당사자는 ‘불법 사찰’이란 역공 카드를 꺼내며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 여권은 이재명 대 반이재명, 야권은 윤석열 대 반윤석열 구도 속에서 조만간 제2, 제3의 폭탄이 터지면서 또 다른 주자가 검증대 위에 서게 될 것이다. 겨울 본선보다 여름 예선이 더 뜨거울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문제는 그들끼리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와중에 대의는 실종되고 대세만 움켜쥐면 된다는 얄팍한 계산이 판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판 딕 모리스’를 자처하는 정치 기술자들이 총동원되면서 인걸은 간데없고 권모술수만 난무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로는 모두가 공정을 외치면서도 이기는 게 곧 선이고 정의며 그게 공정한 정치라는, 역사는 늘 승자의 기록일 뿐이라는 승리 지상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기술이 대선에서도 통하기는 쉽지 않다. 정치학 통계를 보더라도 총선과 지방선거 등은 회고적 투표 성향이 강한 반면 대선은 늘 전망적 투표 성향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21세기 급변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 정책 논쟁 또한 진보·보수라는 이념의 차원을 넘어선 지 오래다. 그런 만큼 누가 더 유능한지, 누가 더 미래를 내다보며 준비했는지가 승패를 좌우할 공산이 커졌다. 게다가 대선은 인물 변수가 그 어느 선거보다 크게 작용해 왔다. 자신만의 실력과 철학 없이 정당과 진영에만 기대서는 승리하기 힘든 구도인 셈이다. 예선과 본선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 싸울 때 싸우더라도 본선 준비는 게을리하지 말기를 바란다. 당분간 사활을 건 이전투구 속에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안갯속 정국이 지속되겠지만, 어느 순간 자욱한 포연이 걷히고 나면 유권자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 사람에게 과연 대한민국의 5년을 맡겨도 될까.” 그 질문에 이미지와 지지율 말고 어떤 미래와 비전을 내놓을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하길 바란다. 그때가 되면 누가 새로운 리더감인지, 누가 위선자인지 자연스레 드러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 어린 왕자의 독백이 허투루 들리지 않을 때가 곧 올 테니까 말이다.

박신홍 정치에디터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