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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꽂힌 이윤기, 유행가 4절까지 몽땅 외워 놀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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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호 16면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17〉 그리스 로마 신화의 대가 친구

조영남씨와 생전 이윤기씨. 조씨는 이씨가 번역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두 주인공처럼 이씨와 우정을 나눴다고 회고했다. [사진 조영남]

조영남씨와 생전 이윤기씨. 조씨는 이씨가 번역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두 주인공처럼 이씨와 우정을 나눴다고 회고했다. [사진 조영남]

지난번엔 소설가 최인호에 대해 썼다. 나는 약속을 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전문가인 이윤기에 대해서도 쓰겠노라고.

비교종교학 전문가 오강남이 소개 #‘양평 은둔자’와 형동생 하며 지내 #“낯선 사람과는 함께 보내기 싫다” #골프도 필드 안 나가고 연습만 해 #“알라 너무 경배하면 빨리 죽는다” #소설 속 인물 ‘조르바’처럼 살다 가

언젠가 나의 청담동 집 응접실 소파에 멍 때리고 앉아 있던 이윤기가 나한테 말한 걸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내 생애를 통틀어 두 달 동안 연속적으로 다섯 번이나 만난 사람은 형님이 처음입니다.”

그의 발언은 실로 놀라운 발언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윤기는 사람을 안 만나는 은둔자로 불렸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전 캐나다에서 만난 오강남 교수의 소개로 이윤기를 만나게 된다. 오강남 교수는 『예수는 없다』(2001년)라는 책을 쓴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 최상급의 비교종교학 전문가다.

오강남 교수를 내가 만나게 된 스토리가 꽤 흥미롭다. 나를 일찍이 미국으로 데려간 사람은 지금 극동방송 사장이며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이었던 김장환 목사님이시다. 세계 최고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에 통역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목사님으로 나를 성가 가수로 미국에서 활약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결정적인 역할자였다.

몽골 민요까지 부른 ‘오리지널 광대’

나는 평생 처음 김장환 목사님과 함께 비행기에 올라 미국 중요 도시 전도 집회를 다니다 캐나다 토론토까지 방문하게 된다. 저녁에 집회를 막 마치고(김 목사님 설교 전후 조영남의 성가 발표) 잠을 자러 호텔로 가는 길에 우리를 태워다준 어느 캐나다 교포의 차 안에 있던 신문 몇장을 무심코 집어 들었다.

한국일보 LA지사에서 나온 신문으로 거기에 실린 종교 칼럼을 무심코 읽게 되었는데 어라! 종교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써놓은 것이었다. 섬뜩한 글솜씨였다. 필자란을 보니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 종교학 교수 오강남이었다. 나는 나를 데려다준 교포한테 얼른 전화를 걸어 오강남이 궁금하다고 했더니 마침 오 교수가 오늘 저녁 집회에 참석했고 연락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내 호텔 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수더분한 차림의 남자가 “제가 오강남입니다” 해서, 그날 아침부터 친교를 트고 그 후 몇 년 동안 우리는 캐나다와 미국 플로리다 사이를 꾸준히 긴 손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내가 오 교수의 첫 번째 책 『길벗들의 대화』(1994년)에 서문을 썼을 정도로 친밀하게 지냈다. 오 교수가 책 출판 관계로 이따금씩 서울을 방문했는데 나는 매번 “조형이 이윤기를 꼭 만나야 하는데”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듣곤 했는데 드디어 디데이(D-Day)가 온 것이다.

차 두 대에 오강남 교수를 비롯, 무시무시한 책 『예수는 없다』를 발간해준, 말 그대로 미모와 지성을 갖춘 현암사 조미현 사장님과 그녀의 부친 조근태 회장님 등과 함께 양평의 은둔자 이윤기를 찾아갔다. 은둔자라 해서 나는 무슨 움막이나 굴을 파고 사는 줄 알았더니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매우 평범한 시골 기와집이었다. 나는 가는 길에 이미 차 속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한 한 따를 자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잔뜩 졸아 주눅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태생적으로 픽션(현실적이 아닌 초자연적인 것)을 멀리하거나 무시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소위 신화라는 것은 온갖 가상세계의 잔치, 각종 신(神)들의 놀이 세계가 아니던가! 나는 평소 SF 영화도 잘 안 본다. 나와 상관없는 딴 나라 세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내가 만나야 하는 인물이 나의 관심을 전혀 못 끌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대가라니 내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만나고 보니, 너무 달랐다. 노태우식으로 그냥 보통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도 곱디고운 보통의 아낙네였다. 은둔자라고 해서 길게 털을 길렀거나 말을 느릿느릿 멋 내서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강남 교수보다도 훨씬 명랑 유쾌한 사람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특히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내 옆자리에 성큼 옮겨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제가 형님으로 부르겠습니다.”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과 시인 이상의 사진을 활용한 1995년 미술작품. [사진 조영남]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과 시인 이상의 사진을 활용한 1995년 미술작품. [사진 조영남]

아! 우리는 이렇게 사람끼리 처음 만난 자리에서 상대에 대한 존칭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시답지 않은 고민으로 얼마나 많은 께름칙한 시간들을 허비했던가. 차라리 사람을 안 만나고 사는 게 낫지. 이윤기한테 붙은 은둔자라는 수식어가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5분 안에 깨버린 게 정작 은둔자 이윤기였다. 결코 깨버리기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 생각해보시라. 그리스와 로마는 얼마나 먼 나라인가. 게다가 그가 번역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얼마나 먼 나라의 고리타분한 얘기들인가. 그런 일로 평생 찌든 이윤기 앞에 고작 대중가요 가수 한 명이 나타났다. 나이가 좀 늙수그레 들어 보이는 가수다. 거기다 책도 쓰고 그림도 그린단다. 뭐라고 이 사람을 불러야 마땅한가. 이런 경우 호칭이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한 곳 뿐이다. 참으로 끔찍스럽게도 어정쩡한 분위기를 이윤기가 나서서 간단하게 해치워 버렸다. “형님으로 부르겠습니다.”

그렇다. 이윤기는 뉴미스(New Myth) 새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이건 과장이 아니다. 진실이다. 외관상 나이가 나보다 대여섯은 더 먹어 보이는 남자가 자신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이는 남자한테 영남이 형님이라는 존칭을 썼으니. 그것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 거기서 신화가 끝나는 게 아니다. 내가 신화를 이어갔다.

“야! 동생 윤기야! 우리끼리 형 동생 하는 건 좋다. 네가 나보다 두 살이나 아래니까 마땅히 나를 형님으로 불러야지. 그러나 윤기야! 너와 나는 타인을 혼돈시키거나 동요시켜선 안 된다. 무슨 소리냐 하면 윤기야 우리 이렇게 약속하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선 내가 너한테 윤기 형님! 너는 나한테 영남이 동생! 이렇게 거꾸로 하는 거다. 우리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다.”

우리의 약속은 몇 년간 제대로 이행됐다. 이윤기가 신화의 대가, 양평 은둔자라는 가면을 벗고(원래는 그런 걸 쓴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중가수인 나한테 살갑게 대한 원인은 따로 있었다. 아! 그건 지금 생각해도 신비스럽고 놀랍다.

이윤기, 그는 우리가 통상 부르는 유행가, 가령 ‘봄날은 간다’ ‘번지 없는 주막’ ‘울고 넘는 박달재’ 같은 노래의 출처 및 노래가사를 3절, 4절까지 모조리 눈 뜨고 외우고 있었다. 어떤 땐 몽골 드넓은 초원 별빛 아래서 배웠다는 몽골 민요까지 불러 젖히는데 와! 조영남은 그냥 광대 나부랭이고 이윤기는 소설가 신화 전문가가 아닌 오리지널 광대, 실력 있는 광대로 불려야 했다.

내 동생 이윤기는 참 이상한 구석이 있는 친구다. 당시 나는 그토록 시간 많이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골프라는 운동을 저주하다시피 했는데 어느 날 골프를 친다는 여친 하나를 맥없이 따라갔다가 노느니 멸치 똥 뺀다고 몇 번 따라서 골프를 치다가 막 재미가 들렸을 때다. 그런데 윤기도 골프를 친다는 것이었다. 소설가 겸 신화학자가 골프를 친다니 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볼수록 수상한 구석이 있는 것이었다. 연습만 엄청나게 했다는 것이다. 준프로급(80대 이내)으로 칠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수 배울 겸 같이 치자고 제의를 했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단 한 번도 남들과 함께 필드에 나가서 실제로 골프를 쳐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연습장에서만 죽어라 쳤다는 얘기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6시간 이상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게 끔찍이도 싫다는 얘기였다. 과연 은둔자다웠다. 그러면서 처음 치는데 80대 이내를 치면 세상 사람들이 놀라 자빠질 것 아니냐는 것이다. 뭐라 곁들일 말이 없어 나는 “윤기, 너는 변태야” 하고 말았다.

우리의 변태(또 다른 모양과 내용) 짓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윤기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천하의 명작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해 놓았는데 우린 처음부터 형은 조르바, 동생은 카잔차키스로 정해 놓고 밤새 낄낄댔다.

조르바라는 인물 자체가 그랬다. 딱 한 번 사는 세상, 되는 대로 맘과 뜻이 가는 대로 살다 죽는다는 극자연인의 샘플이고, 조르바에 홀딱 반한 카잔차키스는 백면서생답게 FM 방식으로 고지식하게 사는 것이다.

조영남처럼 살면 조르바가 되는 것이고, 한 번 이룬 가정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건 카잔차키스 님이 되는 것이다. 나는 똑같은 신학을 공부한 적이 있어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 경전은 기독교 경전(신약 구약 성경)과는 어떻게 다른가. 이때 이윤기는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신화는 죽은 경전”이라던 이유 궁금

“신화 경전은 죽은 경전이고, 기독교적 경전은 살아있는 경전입니다.”

나는 말뜻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우리네의 단군신화를 가슴 깊숙이 품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우리 가슴에 살아 있는 기둥이라며 단군을 세우려다 뜻을 못 이루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나철(羅喆) 선생을 세계 최고의 현대시인 이상(李箱)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악악 떠들어대던 중이었다. 이윤기 말대로 신화 경전이 죽은 경전이라면 단군신화의 『천부경』 같은 경전도 죽은 경전이라는 뜻 아닌가! 하여간 자신이 평생 헉헉대며 일구어낸 신화를 죽은 물건이라고 끌어 내리는 심리가 참으로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지금도 나철 선생에 대한 나의 소신엔 큰 변함이 없다. 지금 이윤기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에 대한 최종 답변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는 2010년 죽었다.

이윤기 하면 생각나는 풀리지 않는 주제 하나가 또 있다. 윤기 말이 이슬람 신비주의 격언 중에 “알라를 경배하라. 그러나 알라에게 너무 사랑받지는 마라. 빨리 죽는다”라는 게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윤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경배한 게 아니라 이슬람 격언을 너무 경배한 것인가. 그렇게 빨리 내 곁을 떠났기 때문에 해보는 넋두리다.

이윤기는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이어령 교수와 맞먹을 세상의 정보와 지식을 몽땅 가지고 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여덟 권이나 번역한 이윤기. 일본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이윤기는 너무 많이 알아 죽음의 신이 빨리 부른 게 아닌가 싶은데 아뿔싸! 실제로 조르바처럼 산 것은 정작 이윤기였다. 병원 가기를 싫어했고, 자연사를 고집한 건 바로 이윤기였다.

조르바처럼 사노라고 위세를 떨던 짝퉁 조르바 조영남은 어제만 해도 서울의대 간호원이 내주는 푸르딩딩한 가운을 팬티 위에 걸치고 병원 침대에 누워 피가 원활히 움직이는가 하는 심전도 조사를 마치고 나왔으니 말이다. 윤기야. 젊은 간호사가 날 더러 “아버님, 무릎을 세워보세요” 하더라. 또다시 맞닥뜨리는 한국식 존칭의 껄끄러움. 내 진짜 딸은 바로 문밖에 있는데. 아! 민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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