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당구 여제 된 '캄보디아 댁', 아이 안 갖고 죽어라 치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피아비 “삼촌 팬 많아져 행복”…당구장서 사인 세례

“삼촌 여깄어요. 사인 예쁘죠.”

스롱 피아비, 프로 전향 넉 달만에 우승

지난 23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 송절동 피아비큐 당구장. ‘캄보디아 청주댁’으로 불리는 스롱 피아비(31)가 아저씨 팬들에 둘러싸여 사인 세례를 받고 있었다. 휘갈겨 쓴 사인 아래 ‘피아비’라고 한글로 이름을 적었다. 여자 프로당구 선수인 피아비는 지난해 7월 당구장을 열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피아비는 연신 ‘삼촌’이란 호칭으로 이들을 반겼다. “삼촌은 원래 가족끼리 부르는 호칭인 걸 알아요. 더 정겹기도 하고, 친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부르죠.”

캄보디아 출신인 피아비는 귀여운 외모와 출중한 당구 실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2010년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 땅을 밟은 뒤 이듬해 남편 김만식(59)씨를 따라 우연히 동네 당구장에 갔다가 재능을 발견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에 매진한 끝에 2014년부터 3년간 전국 아마추어대회를 휩쓸었다. 정식 선수로 데뷔한 지 1년 5개월 만인 2017년 여자스리쿠션 국내 1위에 올랐다. 2018년부터 2년 연속 세계선수권대회 3위, 아시아 여자선수권을 연거푸 제패했다.

남편 따라 당구장 갔다가 입문…하루 10시간 연습

캄보디아 출신 당구 선수 스롱 피아비가 23일 오후 충북 청주시 피아비큐 당구장에서 남편 김만식씨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피아비는 지난 20일 경북 경주 블루원리조트에서 열린 블루원리조트 LPBA 챔피언십 결승에서 첫 우승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캄보디아 출신 당구 선수 스롱 피아비가 23일 오후 충북 청주시 피아비큐 당구장에서 남편 김만식씨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피아비는 지난 20일 경북 경주 블루원리조트에서 열린 블루원리조트 LPBA 챔피언십 결승에서 첫 우승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피아비는 지난 2월 프로당구 선수로 전향했다. 최근 막을 내린 ‘블루원 리조트 LPBA 챔피언십’에선 우승했다. 피아비는 “트로피를 받고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는데, 꿈이 이루어진 것 같아 자꾸 눈물이 났다”며 “요즘 삼촌 팬들이 부쩍 늘었다. 응원을 받으니 더 힘이 났다”고 말했다.

수차례 우승을 경험한 그녀는 “아직 월드클래스는 아니다”라고 했다. “지금도 당구 레슨을 받고 있다. 다음 공을 더 편하게 치는 방법이나 득점 확률이 높은 코스로 게임을 이끄는 능력이 부족하다. 경험을 더 쌓아야 한다”며 자신을 다그쳤다.

피아비의 고향은 캄보디아 캄퐁참이다. 장래 희망이 의사였지만 두 여동생을 위해 17살 때 학업을 그만두고 아버지 감자 농사를 도우며 살았다. “고향에 있을 땐 희망이 없었어요. 감자, 밀, 땅콩, 참깨 농사를 짓느라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였죠.”

2010년 피아비는 한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김씨는 “어찌나 일을 많이 했던지 손끝이 까맣게 풀물이 들었더라. 슬리퍼를 신고 선을 보러왔다. 꾸밈없고 선해 보이는 피아비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캄보디아서 농사 짓다 당구로 인생역전 

캄보디아 출신 당구 선수 스롱 피아비가 23일 오후 충북 청주시 피아비큐 당구장에서 시범을 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캄보디아 출신 당구 선수 스롱 피아비가 23일 오후 충북 청주시 피아비큐 당구장에서 시범을 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한국에 건너온 피아비는 청주의 한 대학가 앞 인쇄소에 신혼집을 차렸다. 집에서 인터넷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2011년 여름, 남편을 따라 당구장에 갔다가 난생 처음 큐대를 잡았다. 피아비는 “어깨너머로 남편이 하는 것을 보고 공을 쳤는데 뱅글뱅글 도는 모습이 신기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제법 공을 치길래 취미로 가르칠까 하다 첫날 큐대 빼앗았다”며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 바엔 시작 안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돌연 마음을 바꿔 이튿날 3만원짜리 큐대를 아내에게 선물했다. 김씨는 “공을 보고 즐거워하는 피아비 모습이 아른거렸다”며 “큐를 사준 뒤 꾸준히 연습을 시키고 청주 오창, 경기도 안산의 좋은 선생님을 찾아가 레슨을 받게 했다”고 말했다. 아내가 대회에 나가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아 김씨가 살림을 도맡아 했다.

“마음의 고향 캄보디아…국적 포기 쉽지 않은 일”

프로당구에 전향한지 두번째 대회만에 우승한 스롱 피아비. [사진 PBA]

프로당구에 전향한지 두번째 대회만에 우승한 스롱 피아비. [사진 PBA]

결혼 생활 12년 차인 피아비는 한국 문화에 푹 빠졌다.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잘한다. 피아비는 “소갈비찜을 제일 좋아해요. 잡채는 두 번째에요”라며 “가수 인순이의 ‘아버지’란 노래를 제일 좋아하는데 고향에 계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피아비는 캄보디아 아이들 사진을 붙여놓고 연습한다. 사진에는 ‘나는 이들을 위해서 살 것이다’란 글이 쓰여있다. 김씨는 “처음에 당구를 시작할 때 ‘당신은 훌륭한 선수가 되어 어렵게 사는 캄보디아 아이들을 도와주라’고 말했다”며 “당구에 전념하게 하려고 아이도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직 캄보디아 국적인 피아비는 “주변에서 귀화하라는 권유를 많이 하지만, 마음의 고향인 캄보디아를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나처럼 형편이 어려워 꿈을 펼치지 못한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청주=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