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걸고 인민군 기밀 캔 인간지도..."난 그때 16세 소녀였다"

중앙일보

입력 2021.06.25 05:00

업데이트 2021.06.2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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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철조망을 넘고 지뢰밭을 건너고, 적진에 있으니 제일 무서운 건 아군 폭격이었어요."

6ㆍ25 전쟁 첩보전의 산증인인 심용해(86) 할머니는 70년 전 첫 임무의 그날을 힘겹게 떠올렸다. 16세 때 어머니 몰래 참전했다는 심 할머니는 10대 후반의 꽃다운 시절을 오롯이 전장에서 계급도 군번도 없이 유엔군을 지원하는 한국인 첩보원으로 살았다.

[오늘 6·25 71주년]
6ㆍ25 첩보전 산증인 심용해 할머니
美 켈로부대원(KLO) 사선 넘나들어
독도법 익힌 뒤 곧바로 작전에 투입
중공군에 잡혔다 구사일생 탈출도해
“우리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줘야”

6·25 전쟁 중 미 육군 25사단 첩보원으로 참전했던 심용해 할머니가 지난 22일 경기도 수원 보훈복지타운아파트에서 취재진을 맞으며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6·25 전쟁 중 미 육군 25사단 첩보원으로 참전했던 심용해 할머니가 지난 22일 경기도 수원 보훈복지타운아파트에서 취재진을 맞으며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그렇게 담대했던 용사도 세월을 이겨내지 못했다. “누워 있다가도 갑자기 사자(死者)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같은 전쟁 후유증을 오랫동안 앓았다. 지난해에는 크게 넘어져 머리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아 몸져누운 상태다.

이제 옛 기억은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지만, 그래도 “나라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은 여전하다. 군복 입을 때가 가장 뿌듯하다는 심씨의 70년 전 기억을 그의 시선으로 옮겼다.

‘에이전트’ 선발 

온 나라가 찢어지게 가난했잖아요. 게다가 전쟁까지 나니 그해 겨울은 정말 추웠어요.
인천상륙작전이 끝나고 인민군이 철수한 뒤였죠. 얼마 안 있어 유엔군이 우리 마을까지 와서 미군 부대원을 모집했습니다.

제 나이 열여섯, 그때는 뭘 하는 건지도 모르고 애국심에 자원했어요. 전쟁이 나고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한 명이라도 죽이고 죽자, 안 그러면 너무 억울할 거 같았습니다. 어머니께 얘기도 안 하고 몰래 집을 나왔었죠.

나이는 어려도 제가 여장부였거든요. 저보다 서너살 많은 동네 언니들을 여러 명 데리고 갔어요. 그때 제 키가 160㎝ 정도였는데, 당시 여자치곤 큰 편인 데다가 덩치도 좀 있었습니다. 몇 마디 안 묻고 절 뽑았어요.

심용해(86) 할머니가 6·25 전쟁 당시 첩보원으로 활동 중 휴가를 나와 가족과 찍은 사진. 오른쪽 위 군복을 입은 사람이 당시 16세였던 심 할머니다. [사진제공 심용해]

심용해(86) 할머니가 6·25 전쟁 당시 첩보원으로 활동 중 휴가를 나와 가족과 찍은 사진. 오른쪽 위 군복을 입은 사람이 당시 16세였던 심 할머니다. [사진제공 심용해]

미군 트럭을 타고 한참 가보니 지금 일산 근처에 미군 부대(미 8군 25사단)가 있었어요. 꽁꽁 언 눈 바닥에 천막을 쳐서 막사로 썼는데, 남자 여자 따로 생활했어요. 미군 군복을 받았는데, 세상에 이렇게 큰 옷이 있나 싶을 정도로 컸어요. 재봉틀을 달라고 졸라서 겨우 고쳐 입고 다녔습니다.

캡틴(captainㆍ대위) 양이란 미군 장교와 한국인 통역이 우리를 훈련시켰어요. 교육하면서 우리를 ‘에이전트(agentㆍ요원)’라고 부르더군요.

지도 읽는 법을 가르쳐줬는데, 작은 지도 안에 한 개 구(區) 정도가 표시돼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거 공부 못하면 나가서 길을 잃고 죽는다”고 겁을 줬어요. “포성이나 폭격음이 들리면 무조건 숨어서 엎드려라” 그런 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는 별로 배운 게 없어요.

포화 속으로  

1주일 정도 그런 훈련을 받고는 바로 현장에 투입됐어요. 피란민으로 속이고 적진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전 무명 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인민군이 있는 마을에 들어갔죠. 그곳에 무슨 부대가 있고, 탄을 어디에 얼마나 쌓아뒀고, 전차는 어디에 배치돼 있는지 등 눈에 보이는 건 죄다 외워 오는 게 임무였습니다. 인간 지도인 셈이죠.

작전 들어갈 때는 식량이고 뭐고 신분이 들통날 만한 건 일체 들고 가지를 않았어요. 산나물을 뜯어 먹고 물이 없으니까 신발에 빗물을 받아먹고는 했습니다. 자꾸 굶으니까 위장병에 걸릴 수밖에요.

돌아오는 게 더 힘들었습니다. 총탄이나 포탄을 피하는 건 물론이고 철조망을 넘고 지뢰밭도 건너야 했죠. 제일 무서운 건 아군 폭격이었어요. 적진 깊숙이 있으니 그런 거죠. 폭격을 피하려고 급하게 눕다가 턱을 돌에 찧어서 이 2개가 없어진 적도 있습니다. 상처는 대수고 양팔 모두 두 번이나 부러지고 갈빗대가 부러진 적도 있어요.

목숨건 첩보 활동.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목숨건 첩보 활동.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두 살 많은 서울 언니는 다리에 총상을 입어 절게 됐어요. 그래도 다행인 거죠. 나가서 죽고 못 돌아오는 사람이 더 많았어요. 처음 임무 나가자마자 죽고, 두 번 나가서 죽고 그렇게 초짜들이 많이 당했어요.

처음 부대 들어올 때 수십명이 같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몇 명 남지도 않았더군요. 그때마다 미군이 후방에서 새로 사람들을 모집해서 충원했습니다. 어떤 때는 사단들끼리 첩보원을 교환해서 중부 전선에 있던 사람이 서부 전선으로 가기도 했어요.

중공군 포로가 되다

목적지도 제대로 못 찾고 잡힌 첩보원이 부지기수였어요. 중공군에게 잡히면 포로 취급이라도 받지, 인민군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죽였어요.

저도 강원도 철원 금학산 지역에서 중공군에 붙잡힌 적이 있습니다. 중공군이 제가 미군 지프에서 내리는 걸 숨어서 지켜보다가 생포한 거죠.

적진에 침투했다가 귀환한 KLO 여성 첩보원이 심문 형식의 첩보보고를 하고 있다. [사진 군사편찬연구소]

적진에 침투했다가 귀환한 KLO 여성 첩보원이 심문 형식의 첩보보고를 하고 있다. [사진 군사편찬연구소]

처음에는 소나무에 매달고 대검으로 위협하더군요. 말이 통합니까. 억울하다고 자꾸 소리만 질렀습니다. 그 이후로는 끌고만 다녔는데, 낮에는 미군 공습을 피해 쉬고 밤에 이동하는 식으로 보름 동안 걷고 또 걸으면서 강원도 평강까지 갔습니다.

같이 가던 중공군들도 탈진할 만큼 강행군이었어요.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노렸다가 어렵게 탈출할 수 있었죠. 포로가 된 덕에 얻어낸 것도 있었습니다. 중공군 방공호 위치를 눈으로 익혀뒀다가 귀대하자마자 바로 보고했어요.

마지막 임무

전쟁 때 마지막으로 투입된 건 정전회담 막바지 무렵인 1953년 여름이었어요. 그때는 서부 전선에 있었는데, 임진강을 건너 황해도에 다녀오는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강을 건너자마자 3일 내내 비가 내리는 겁니다. 버티다 못해 돌아가려고 강에 들어갔다가 몇 발짝 걷지도 못하고 떠내려갔어요. 한참을 내려가다가 치마가 바위에 걸렸습니다.

다행히 아군 지역이어서 미군이 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겨우 살아 돌아와 부대에 전화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죽은 줄 알고 포기하고 있었다. 너무 고맙다”고 하더군요.

휴전이 되자 서울 인사동에 있는 KLO(Korea Liaison Officeㆍ연합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예하 한국인 첩보부대) 본부에 가서 신고하고 제대하라고 하더군요. 가보니까 아무래도 우리가 자기네들보다 배운 것도 없고 하니 무시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어요. 수고했으니 그냥 집으로 가라는 거예요.

6·25 전쟁 당시 미군 사단에 배속된 첩보원으로 활약했던 심용해(86)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 심 할머니는 전후 상이용사와 결혼해 참전용사 부부가 됐다. 지난 1994년 작고한 남편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JTBC 화면 캡처]

6·25 전쟁 당시 미군 사단에 배속된 첩보원으로 활약했던 심용해(86)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 심 할머니는 전후 상이용사와 결혼해 참전용사 부부가 됐다. 지난 1994년 작고한 남편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JTBC 화면 캡처]

너무 억울해서 제가 야단을 치니까 그제야 영문 타자기로 뭘 하나 급히 만들어서 줘요. ‘유엔 경찰’ 자격증이라면서 주는데, 그걸로는 군용 열차조차 탈 수 없더군요. 역에서 본부로 전화해 신원 확인을 해준 뒤에야 열차를 태워줬습니다.

그렇게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안 있어서 같이 활동하던 두 살 위 남자 대원이 찾아왔어요. 다시 가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휴전한 것에 대해서 많이 화가 나 있는 상태라서 못 간다고 버텼는데, “그래도 나라를 생각해서 제발 같이 가자”고 조르는 겁니다.

결국 마음을 고쳐먹고 따라나섰는데, 서울 가회동에 100평 정도 되는 한옥 안가가 있더군요. 북파 공작원 대기 장소였어요. 그곳에서 한 1년 정도 있었습니다.

전쟁 끝나고도 항공기 타고 북한에 침투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같이 있던 사람들 중에 ‘모택동’이란 별명을 가진 아기 엄마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렇게 갔다가 돌아오지를 못했어요.

전쟁의 후유증 

우리는 적진에서 움직였잖아요. 그러니까 적들이 죽어가는 걸 매번 보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몰라요.

어떤 때는 내가 첩보를 건네서 저 사람들이 죽은 것 아닌가 그런 죄책감이 들 때도 있었어요. 우리도 사람이잖아요. 자려고 누워 있으면 갑자기 죽은 사람들 얼굴이 떠오르는 날들이 많다 보니,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잘 못 잤어요.

정부에 대해서 정말 제가 아주 섭섭해요. 너무너무 섭섭해요. 우리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을 적에는 모르지만, 또 많은 사람이 살아있지 않아서 그렇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야 돼요. 어쩌면 산 사람이 더 고통 속에 살아가는 거 아닌가요. 70년을 그렇게 살았잖아요. 알아달라는 게 아니라 당연히 알아줘야지 되는 거 아닌가요.

6·25 전쟁 중 미 육군 25사단 첩보원으로 참전했던 심용해 할머니가 지난 22일 경기도 수원 보훈복지타운아파트에서 군복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다. 이날 심 할머니의 군복에는 전우회가 만든 부대 마크가 달려 있었다. 전쟁 당시 군번도 계급도 없이 참전했던 KLO 대원들은 전후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했다. 김상선 기자

6·25 전쟁 중 미 육군 25사단 첩보원으로 참전했던 심용해 할머니가 지난 22일 경기도 수원 보훈복지타운아파트에서 군복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다. 이날 심 할머니의 군복에는 전우회가 만든 부대 마크가 달려 있었다. 전쟁 당시 군번도 계급도 없이 참전했던 KLO 대원들은 전후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했다. 김상선 기자

심 할머니와 같은 한국인 첩보원들은 전쟁 당시 미군으로부터 보급품을 지급받았다. 급여는 없었다. 국군이 아닌 유엔군 소속이었다는 이유로 휴전 이후 68년간 한국 정부로부터 보상은 물론 훈장도 받지 못했다.

전쟁 당시 연인원 6000여명이 투입돼 대부분 현장에서 전사했다. 현재 생존한 이들 참전용사는 채 100명이 되지 않는다.


김상진ㆍ박용한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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