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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6·25 특별기고

권력자의 무지가 낳은 비극 되풀이 말아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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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홍구 전 국무총리 유민문화재단 이사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 유민문화재단 이사장

6·25전쟁 발발 71주년을 맞는 국민의 심경은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아무리 국제정세가 복잡하였더라도 민족상잔의 피와 한으로 점철된 통일을 단숨에 이루어내겠다는 북한 정치지도자의 유치한 결정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부적절하였던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단숨에 삼켜버리겠다는 김일성의 경솔한 판단은 결국 미국과의 전쟁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의 논리를 망각한 무지의 소치였던 것이 곧바로 증명되었다. 그러한 김일성의 오판에 동조했던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의 경우도 주요국 지도자의 상황 오판이나 무지의 대가가 얼마나 큰 것 인가를 역사는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김일성, 미국 참전 예상못하고 오판 #동조한 스탈린·마오쩌둥도 큰 실수 #6·25에서 교훈 못얻고 핵강국 지향 #김정은, 한·미와 조율하는 지혜를

왜 이렇듯 국제정치의 중요한 전환기인 1950년에 지도자들의 오판이 속출하게 되었는가? 2차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며 전후 질서 수립에 앞장선 미국의 국민이나 지도자에 대해 대부분 국가의 이해 수준이 지극히 미흡하였던 것도 오판의 원천적 이유라고 생각된다.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김일성의 결심이나 결정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있지 않다. 북의 남침 결정은 무식이 오히려 모험의 힘이 되었다는 한편의 역사적 사례였다고 하겠다.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한 스탈린이나 이에 동조한 마오쩌둥의 경우도, 그들이 미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북한의 1950년 6월 25일 남침에 동조한 상황적 여건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소련의 경우에는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에 이어 핵 강국의 위치를 확보하였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시 연합국의 합의에 따라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북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한 군사적 우위를 이용하여, 북한 정권과 체제의 출범을 총괄 지휘한 정치적 기득권 소유국이라는 자부심도 작동하고 있었다. 한편, 마오쩌둥의 경우에도 1949년 중국 내전에서 승리하여 국민당 세력을 대만으로 축출한 여세를 몰아 북한 정권의 한반도 통일 전쟁을 당연히 지원할 자세가 정립되어 있었다.

이홍구 특별기고 그래픽

이홍구 특별기고 그래픽

결국, 스탈린의 소련이 지원한 탱크부대를 앞세워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입할 당시 김일성은 북한군이 비교적 단시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뿐, 미군의 개입 가능성은 무게 있게 고려되지 않았다.

아마도 1950년 초에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에 명시하지 않은 채 발표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 혼선을 조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전 개전 직후부터 미국의 참전활동은 즉각 시작되었고, 확고한 미국의 대응 결정이 워싱턴에서 내려진 것은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상황의 전개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첫째 트루먼 대통령의 특수한 리더십, 둘째 동서냉전 초기부터 미국 정부에서 구축된 소련 팽창전략에 대한 확고한 대항전략과 이를 주도한 조지 케넌(George Frost Kennan) 대사의 공헌, 셋째 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의 국제정치 주도권은 국제연합을 중심으로 강화하겠다는 기본정책을 한반도 사태에 적용하는 데 기여한 필립 제섭(Philip Jessup)교수의 활동을 중심으로 돌아볼 수 있다.

첫째,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거로 1944년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마지막 역할을 담당하게 된 트루먼 대통령은 ‘위대한 지도자’라기 보다는 가장 미국적 전통과 가치를 충실히 지켜갈 수 있는 리더였으며, 특히 미국 서부지역 주민들의 개척자적 가치를 체질화한 대통령이었다. 백악관을 떠나 오랜만에 주말을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보내기 위해 도착한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시간 6월 25일 새벽에 한반도에서 러시아제 탱크부대를 앞세운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전면 침공을 시작하여 서울을 포함한 모든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고 있으며 북한군의 기세가 우세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모든 시민이 잠든 일요일 아침에 한국을 기습한 북한의 도발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적 행동이며, 확실히 응징해야 할 것이라는 즉각적 반응을 보였다. 대통령은 국제법을 인용하기보다는 이러한 비겁한 행동은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입장을 미국 서부인의 개척자적 전통에 따라 표현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워싱턴으로 귀환하기 전,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미국의 한반도 참전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백악관에 도착하여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하였다. 바로 그 회의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부터 4년간 대통령의 외교고문 겸 무임소대사를 역임한 필립 제섭 교수의 의견에 따라 한국전에 즉각 참전하는 미군은 유엔군 사령부에 소속하기로 결정하였다. 1948년 유엔의 결정과 감시 아래서 한반도 38선 이남에서 진행된 자유 선거의 결과로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라는 인정을 받고 탄생한 대한민국 정부를 기습적으로 공격한 북한의 침략에 대해 유엔의 깃발 아래 집합하는 유엔회원국과 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부의 지휘에 따라 행동한다는 결정이다. 이로써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은 국제질서와 정의를 수호하는 특별한 전쟁의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로부터 71년이 지난 작금의 세계정세, 즉 한반도와 미국·러시아·중국 등 주변 강대국의 관계는 새로운 양상과 동력을 갖게 되었다. 올해 초 출범한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강대국 관계, 특히 미·중 관계에 새로운 외교, 경제 및 안보전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한 국제정치의 전환기에서 동북아의 러시아·중국과 더불어 새로운 핵 강국을 지향하는 북한의 동향이 계속 국제적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6·25전쟁을 시작한 김일성 시대처럼 미국을 제대로 모르고 돌진하기보다는 미국의 입장과 북한의 바람, 그리고 한국의 위치를 함께 조율하는 지혜를 김정은 시대의 북한이 보여주는 것이다. 러시아나 중국 및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가 동참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될 이 시점에서 또다시 북한만이 예외가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홍구 전 국무총리·유민문화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