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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중 빈과일보 폐간 날, 홍콩 시민들 밤새 가판대 줄섰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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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빗속에서 가슴 아픈 작별. 우리는 빈과를 지지한다.”

마지막호 평소 12배 100만부 찍어 #시민 “목소리 낼 언론이 사라졌다” #지오다노 창업자 라이, 95년 창간 #우산혁명 앞장서 당국에 미운털 #‘보안법 위반’ 사주·편집장 등 체포

홍콩의 대표적 반중(反中) 매체 빈과일보(蘋果日報)가 24일 발행한 마지막 신문의 1면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창간 26주년을 자축한 지 나흘 만으로, 홍콩 국가보안법(보안법) 시행 1주년을 엿새 앞둔 시점에 폐간됐다.

폐간을 알린 신문 1면에는 스마트폰 조명등으로 홍콩 동부 정관오(將軍澳)에 있는 빈과일보 사옥 전경을 비추는 한 지지자의 손을 찍은 사진이 실렸다. ‘한 입 베어 문 사과’를 표현한 로고도 그대로였다. “선악과를 따지 않았더라면 악(惡)도 없고 뉴스도 없을 것”이라며 사주인 지미 라이(黎智英)가 정한 로고다.

총 20면으로 발행된 마지막 신문은 9면까지 빈과일보에 대한 최근 당국의 단속과 독자들이 전하는 아쉬움으로 채워졌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 명보 등 다른 홍콩 매체도 이날 1~3면을 통해 빈과일보의 폐간 소식을 전했다.

경찰 500명 사옥 압수수색, 26억 동결

24일 홍콩의 신문 가판대에서 한 독자가 반중 논조로 유명한 빈과일보의 폐간호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그 뒤로 이를 사려고 길게 줄을 선 시민들이 보인다. 이 신문은 당국이 보안법을 이유로 편집국장과 5명의 에디터를 구속하고 자금을 동결하자 폐간했다. [AP=연합뉴스]

24일 홍콩의 신문 가판대에서 한 독자가 반중 논조로 유명한 빈과일보의 폐간호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그 뒤로 이를 사려고 길게 줄을 선 시민들이 보인다. 이 신문은 당국이 보안법을 이유로 편집국장과 5명의 에디터를 구속하고 자금을 동결하자 폐간했다. [AP=연합뉴스]

이날 홍콩 언론에 따르면 수백 명의 시민은 마지막 신문이 발행되기 전날 밤 빈과일보 본사로 몰려들었다. 빈과일보의 마지막 밤을 함께하기 위해서다.

23일 밤 11시45분 람만청(林文宗) 집행총편집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문 강판(편집 완료 후 인쇄 시작)을 지시한 뒤 직원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에 직원들은 모두 일어나 “힘내자(Keep it up) 홍콩”을 외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건물 밖에서 기다리던 시민들도 “고맙습니다. 지미 라이. 고맙습니다. 빈과일보 직원들”을 외쳤다.

이들 중 몇몇은 2014년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 시위 당시 사용했던 노란색 우산을 펼쳐 들었다.

24일 0시20분쯤 빈과일보 직원들은 건물 밖으로 나와 단체사진을 찍고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곧이어 정문에서 마지막 신문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홍콩 거리의 신문 가판대에는 수십m의 긴 줄이 늘어섰다. 마지막 빈과일보를 사려는 시민들이 몰려들면서다. 한 시민은 “빈과일보가 폐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전날 오후 10시부터 가판대에 나와 기다렸다”고 말했다. 이들은 다음 날 0시55분쯤 첫 인쇄분이 도착할 때까지 3시간가량을 기다렸다. 독자들은 2~10부씩 신문을 사 갔다. 12부를 산 한 독자는 공영방송 RTHK에 “빈과일보를 살 수 있어서 행복하지만, 오늘은 불행한 날”이라며 “신문을 동료와 가족들에게 나눠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빈과일보는 평소보다 12배 많은 약 100만 부를 발행했다.

빈과일보의 모회사 넥스트디지털은 지난 23일 폐간을 결정했다. 홍콩 당국이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사주·편집장·주필 등을 체포하고 회사 자산을 동결한 뒤다. 빈과일보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구독자에게 알리는 글’이라는 안내 문구만 올라와 있는 상태다. 넥스트디지털이 소유한 자매지 일주간(壹周刊)도 이날 운영을 중단했다.

지난 17일 홍콩 당국은 경찰 병력 500여 명을 동원해 빈과일보에 대한 압수 수색을 벌였다. 이어 1800만 홍콩달러(약 26억원)의 회사 자산도 동결했다. ‘국가 안보에 관련된 정보를 외국에 제공하는 행위’ 등 외국 세력과의 결탁을 금지하는 보안법 29조를 위반했다는 혐의다. 이미 지난해 8월 라이 사주와 그의 아들 등 9명도 보안법 29조 위반으로 체포됐다. 입법 당시부터 자의적 적용 가능성에 가장 논란이 컸던 조항이다.

EU “표현자유 말살” 중국·홍콩 비판

빈과일보 창간에서 폐간까지

빈과일보 창간에서 폐간까지

빈과일보는 지난해 6월 30일 홍콩 보안법 발효 이후 폐간한 첫 언론사가 됐다. 신문은 1995년 의류 브랜드 지오다노로 성공을 거둔 사업가 라이가 창간했다. 초기에는 선정적인 보도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95년부터 2006년 사이 음란물 법령 위반으로 56차례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2003년 홍콩 보안법 반대 시위, 2014년 ‘우산 혁명’을 계기로 홍콩 정부와 중국 당국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대표적 반중 매체로 자리 잡았다.

SCMP는 “이번 폐간 사태에 시민들은 더는 목소리를 낼 언론사가 없을 것이고, 언론의 자유도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빈과일보의 갑작스러운 폐간은 국제적으로도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보안법을 통해 뉴스와 표현의 자유를 말살하고 언론 자유를 심각히 파괴하는 행위”라고 중국과 홍콩 당국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EU 주재 중국사절단 대변인은 “유럽이 언론 자유를 명분으로 홍콩 문제와 중국 내정을 노골적으로 간섭하고 있다”면서 “이는 국제법과 국제관계 기본 원칙을 심각히 위반한 것으로, 강한 불만과 강력한 반대를 표명한다”며 반발했다.

김홍범 기자 kim.hongbu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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