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입안에 부드럽게 퍼지는 달콤 고소한 맛…먹자마자 이게 ‘할바’구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성님, 시장헐 긴데 이거 잡숫고 하소.”

명유미의 맛있는 세계여행

“뭣인데?”
“배추뿌린데 삶아서 콩고물을 묻혔소. 묵을 만하요.”
“여태 그게 있었나?”
“독 안에 감차아둔 것을 아침에 밥 위에 얹어서 쪘다마는, 새끼들이 클라꼬 그라는가 우찌 묵을라 카든지.”
두 아낙은 일감을 밀쳐놓고 삶은 배추 뿌리를 먹는다. 말랑하고 향긋한 냄새가 나며, 쌉쌀한 맛을 혀끝에 느끼며, 입가에 콩고물을 묻혀가며 먹는다.     『토지』 1부 2권 중

희한한 일이다. 책 속의 주인공은 잘생기고 멋있을수록 선망의 대상이 되건만, 책 속의 음식은 소박할수록 군침을 끌어모은다. 독서를 하면서 가장 배가 고팠던 적은 박경리의 토지를 읽을 때다. 진귀한 반찬이 올라오던 양반집 규수 서희가 깨작거리며 먹는 밥상이 아닌, 짠지를 얹은 뜨거운 보리밥, 참기름을 겨우 구해 무친 나물, 가끔가다 올라오는 삶은 계란 한 알이 등장하는 하인들 밥상이 나올 때다. 그들이 볼이 메어 터지게 밥을 쑤셔 넣는 모습을 읽을 때는 정말 참기 힘든 식탐이 올라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책을 집에서 읽었다는 것이다. 김치 찢는 소리부터 야무지게 그릇을 비우는 소리까지 들렸던 그 생생한 묘사 덕에 나는 부엌을 들락거리며 배를 채워야만 책을 마저 읽을 수 있었다. 문득, 세계 여행 중에 읽었더라면 저 소박한 시금치나물이니 배추 뿌리니 시래깃국 같은 것을 먹고 싶어서 어찌 견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유미 작가는 터키 여행을 기획하며 할바를 빼놓지 않았다. 우연히 책에서 만난 할바의 맛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진 명유미]

명유미 작가는 터키 여행을 기획하며 할바를 빼놓지 않았다. 우연히 책에서 만난 할바의 맛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진 명유미]

이번 여행에서 은근히 기대한 것 중엔 '책에서 읽고 마음에 품은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 있었다. 이번 여행이야말로 블로거가 알려주는 구체적인 ‘맛집’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책에서 만난 나의 로망 음식들을 먹어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가장 오래전에 내 마음에 들어온 음식은 단추 수프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디즈니 그림책 『단추로 끓인 수프』를 읽고서였다.

단추 한 개로 맛있는 수프를 잔뜩 끓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데이지가 커다란 솥단지를 불 위에 올리고 물과 단추 한 개를 넣고는 자기 키만 한 나무 주걱을 휘휘 저으며 수프를 끓이기 시작한다. 구두쇠 스크루지는 혹하지 않을 수 없다. 데이지는 말한다. “여기에 소금만 있다면 정말 맛있을 텐데.” 스크루지는 “소금쯤이야”라며 자신의 식품 저장고에서 소금을 가져온다. 데이지는 곧 “당근이 조금 있으면 정말 환상적일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스크루지의 식품창고는 비어가고 수프는 맛있게 완성되어 모든 마을 사람들이 나눠 먹는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점점 더 걸쭉하고 풍부해지는 솥단지의 수프는 마지막 장에서 거친 나무 볼에 담겨 온 마을 사람들 손에 오를 때 그 먹음직스러움이 절정을 찍는다.

이후 내겐 막연히 유럽에 가서 구식 철제 수프 냄비에 오래 끓인 걸쭉한 수프를 투박한 그릇에 담아 먹어보고 싶은 동경이 생겼다. 이 바람은 이번 여행에서 제대로 이루지는 못했다. 그나마 맛으로 가장 근사치에 가까웠던 수프는 뉴욕의 식품점 ‘딘 앤 델루카’에서 비가 오는 날 플라스틱 컵에 받아먹은 감자 당근 수프였고, 비주얼로 유사했던 것은 헝가리의 한 골목 식당에서 먹은 ‘굴라쉬’였다. 작은 철제 팟에 담긴 걸쭉한 스튜에는 고깃덩어리·당근·감자·양파가 섞여 있었다.

로망 음식을 먹기 위해 여행 일정을 조정한 적도 있었다. 일본 작가 요네하라 마리가 쓴 『미식 견문록』에 등장하는 터키 과자 ‘할바(helva)’에 대한 묘사를 읽은 후에는 우리의 일정에 터키를 포함시켰다.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 각종 먹거리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한데, 그중 할바에 얽힌 이야기는 안타까울 정도다. 작가는 초등학생 때 친구가 외국에서 사다 준 이 과자를 딱 한입 먹어본 이후 그 맛에 반했는데, 작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온 가족이 외국에 나갈 때마다 찾아 헤맸지만 다시 못 찾았다고 했다.

할바는 터키 과자점에서 찾기 어렵다. 꿀과 치즈, 견과류를 파는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 명유미]

할바는 터키 과자점에서 찾기 어렵다. 꿀과 치즈, 견과류를 파는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 명유미]

책을 읽은 후 그 한이 내게 전달되어 나 또한 서울 이태원의 모스크 주변 터키 과자점을 뒤지기도 했다. 가게에는 터키 과자의 대명사인 터키쉬 딜라이트(Turkish delight)뿐이었다. 터키쉬 딜라이트는 일종의 젤리인데 만드는 방법부터 할바와는 다르다. 혹시나 해서 사본 터키쉬 딜라이트는 너무 달기만 하고 감흥이 없었다.

터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스탄불의 화려한 과자점 점원들은 관광객인 나에게 하나같이 터키쉬 딜라이트를 권했다. 가끔 다른 종류의 과자도 있었지만, 요네하라마리가 묘사하는 부드러운 질감에 고소한 땅콩 맛이 나는 할바와는 달랐다. 우리가 할바를 만난 것은 저녁 식사를 하러 간 터키 전통 음식점의 디저트 순서에서였다. 접시에 황토색 두부를 얇게 한 조각 썰어 놓은 듯한 것이 나왔다. 위에는 땅콩이 뿌려져 있었고 오븐에 구웠는지 그릇까지 따뜻했다. 티스푼으로 떠먹는데 달콤하고 고소한 땅콩 맛과 크림 향이 퍼진다. 순간 이게 할바라는 것을 알았다.

할바는 원하는 만큼 잘라서 판매한다. [사진 명유미]

할바는 원하는 만큼 잘라서 판매한다. [사진 명유미]

할바는 관광객들이 찾는 터키 과자 가게보다는 터키 사람들이 가는 꿀과 치즈, 견과류를 모아놓고 파는 가게에서 찾을 수 있었다. 큰 덩어리에서 손님이 원하는 만큼을 썰어 종이에 포장해 준다. 우리는 터키 서쪽 끝인 이스탄불에서 버스를 타고 터키의 동쪽 끝까지 갔는데 관광지에서 벗어날수록 더 싸고 투박하고 다양하고 맛난 할바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날이 선선해져서일까. 부쩍 할바가 생각났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좀처럼 할바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인터넷에 소개된 간단한 버전의 레시피로 ‘무모한 도전’을 하기로 했다. 할바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대로 만들려면 전문가의 손길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재료는 대단치 않지만 끓이고 식히는 과정에서 농도와 점성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절망. 제대로 망해버렸다. 일단 만들면서 내내 의아했던 것이, 아무리 꿀과 타히니를 열심히 섞어도 식히는 과정에서 분리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루를 기다려서 냉장고에서 꺼낸 내가 만든 할바는 정확히 두 층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일층은 꿀, 이층은 타히니. 이렇게 된 할바는 냉장고에서 꺼내면 10분 안에 점차 주저앉아 녹은 외계생명체처럼 되어버린다. 혹시 누구 할바 만드는 것 성공하신 분?

그때 그 요리!|터키 할바

재료
꿀 2컵, 바닐라 익스트렉트 1ts, 구운 피스타치오(혹은 아몬드) 한 컵 반(무염), 참깨 1컵 반, 올리브유 1컵

만드는 법
① 참깨와 올리브유를 믹서에 넣고 갈아 ‘타히니’라는 이름의 중동 참깨소스를 만든 후 팬에 올려 따뜻하게 데워 둔다.
② 잘 코팅된 팬에 꿀을 넣고 데운다. 찬 물 컵에 데우던 꿀을 한 방울 떨어뜨렸을 때 꿀이 볼 모양(구형)이 된다면 알맞은 온도로 데워진 것이다. 불을 끄고 한 김 식힌 후 여기에 바닐라와 견과류를 넣고 섞는다. 그 후 타히니를 넣고 잘 섞는다.
③ 케익팬이나 도자기 그릇에 오일이나 버터를 발라 들러붙지 않게 한 후 2번을 붓는다. 식으면 랩을 씌워 냉장고에 넣고 하루 정도 굳힌다.
④ 칼로 썰어서 차와 함께 먹는다.

▶ 명유미 작가는
삶의 방식을 고민하며 2013년, 1년 동안 남편과 세계여행을 했다. 지금은 이 여행이 삶의 가장 중요한 양분이 되었음을 체감하며 살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 아동 청소년책을 소개하는 ‘달걀책방'을 열고 운영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