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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 가득 좋은 흙에서 자란 채소맛, 바로 먹어야 알 수 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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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와 고기. 이 둘을 둘러싼 대화나 논의는 주로 이런 식이다. 고기만 먹고 채소는 먹지 않는다든가, 고기를 끊고 채소를 먹기 시작했다든가, 아니면 건강을 위해 채소를 더 먹자는 정도다. 아, 하나가 더 있긴 하다. 드물지만 고기보다 채소를 잘 먹는 사람들이다. 순전히 취향의 문제이고 개인의 선택이다. 그리고 육즙이 흐르고 감칠맛이 휘몰아치는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고기의 강한 감칠맛에 비한다면 채소는 더 자연스러운 맛이니까. 은은한 쓴맛과 적당한 매운맛, 자연스러운 시큼함과 단맛 같은 거다.

발효카페 큔의 공동 창업자 정성은(왼쪽)과 김수향 대표. 황정옥 기자

발효카페 큔의 공동 창업자 정성은(왼쪽)과 김수향 대표. 황정옥 기자

그러니 타고나길 채소가 좋다면 모를까, 강렬한 고기를 은은한 채소가 어떻게 쉽사리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발효카페 큔의 김수향 대표는 이런 전제를 모두 엎어버릴 말을 했다.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밭에서 막 뽑은 채소, 먹어본 적 있으세요?”

농부가 정성 들여 키운 채소를 밭에서 막 뽑아 먹은 그 순간, 그는 채소에 반해버렸다. 고기를 싫어하는 것도,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니다. 채소가 정말 진심으로 맛있어서다. 채소가 맛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햇볕을 잔뜩 받고 좋은 흙에서 자란 채소를 바로 그 자리에서 먹어본 경험이 없어서일 확률이 높다.

요즘 말로 김수향 대표를 소개하자면, ‘채소에 진심인 사람’ 정도가 아닐까. 그가 걸어온 길만 봐도 얼추 짐작이 간다. 재일동포 3세인 그는 1년 어학연수로 한국에 왔다가 일본 매체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게 됐고 그 결과 일본에 한국을 소개하는 잡지 수카라를 2005년 창간했다. 편집장부터 시작한 그는 2006년 8월 산울림소극장 1층에 카페 수카라를 열었다.

김수향 대표는 "햇볕을 잔뜩 받고 좋은 흙에서 자란 채소를 바로 그 자리에서 먹어본다면, 그 맛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진 큔인스타그램]

김수향 대표는 "햇볕을 잔뜩 받고 좋은 흙에서 자란 채소를 바로 그 자리에서 먹어본다면, 그 맛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진 큔인스타그램]

채소 음식이 맛있는 카페로 유명했던 곳이다. 2012년에는 생산자가 보이는 농부시장 마르쉐@를 공동기획했고 2019년 12월 서촌에 채소를 맛있게 먹기 위한 발효식품과 발효요리를 선보이는 발효카페 큔을 오픈했다. 큔에서 김수향 대표를 만나 채소에 진심이 된 사연, 그리고 요리하는 삶에 관한 이야기와 앞으로의 목표를 들어봤다.

15년을 운영한 카페 수카라가 2021년 2월 7일에 문을 닫았죠.

수카라는 지난해 코로나 19의 타격을 많이 받았어요. 가까운 곳에서 확진자가 크게 터졌거든요. 두세 달 정도 동네에 사람이 없었는데 그때 그 주변의 가게 대부분이 사라졌어요. 큔은 2019년 12월에 오픈했어요. 11월에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는데, 주변에 시위가 끊이질 않았어요. 느긋하게 밥을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요. 덕분이라고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코로나 19가 터지고 고즈넉해졌어요.

수카라부터 큔까지, 대표님을 이 자리에 있게 한 근간은 ‘채소’ 아닌가요? 채소에 꽂히게 된 이유가 있나요.

잡지 수카라의 편집장을 할 때, 정신없이 마감하고 밤에 밥을 먹으러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이 치킨집, 고깃집, 술집이었어요. 매일 치킨에 고기를 먹을 수는 없어서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곤 했어요.
당시 출장으로 일본을 오가는 일이 많았는데, 일본에는 오가닉이나 페어 트레이드 같은 개념이 생기고 있었어요. 그런 공간에서 위로를 받곤 했죠. 그러던 중에 잡지사가 있던 산울림소극장 건물 1층을 카페로 운영해보라는 제안을 받고 자연스럽게 ‘저녁에도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가게’를 떠올렸어요. 기왕이면 안전하고 맛있는 채소요.

발효카페 큔은 낮과 밤의 메뉴가 다르다. 사진은 낮큔의 구운채소와 비건발효버터 커리. [사진 큔 인스타그램]

발효카페 큔은 낮과 밤의 메뉴가 다르다. 사진은 낮큔의 구운채소와 비건발효버터 커리. [사진 큔 인스타그램]

2012년에는 마르쉐@를 공동기획하셨죠.

2011년, 아는 일본 분의 책을 같이 제작한 적이 있어요. 도쿄에서 열린 책 출간 토크 이벤트에 참석한 후에 요코하마 집으로 가던 지하철 안에서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어요. 원전에서 250㎞ 거리 안에 제가 있었어요. 공기가 오염됐고, 일주일 뒤에는 물에서 세슘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이후 가까운 지역의 농산물에서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죠.
따지고 따져보니, 사고의 원인은 저에게 있었어요. 요코하마에서 쓰는 전기 100%가 후쿠시마에서 생산되는 것을, 제가 먹던 음식이 그 주변에서 생산된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어요. 그 사실이 충격이었고, 명백한 제 책임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생산자가 보이는 시장 마르쉐@를 기획하신 거군요.

고민 끝에 생산을 확인할 수 있는 소비만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 현장을 보여주지 않아요. 농약은 얼마나 쓰는지, 어떻게 키우는지 보여주지 않은 채 제품을 광고하고 유통해요. 저 역시 그 굴레 안에 있었고요.
제가 내린 답은 ‘시장’이었어요. 제가 시장 마니아예요. 한국의 오일장을 쫓아다니다 잡지 수카라도 만들었거든요. 확신이 서자 “시장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다행히 함께 해보자는 제안이 있었고, 마르쉐@를 만들게 됐죠. 옥상 텃밭도 같이 시작했어요. 옥상 텃밭에서 자란 채소를 수카라에서 받기 시작했고요.

큔에서는 매주 수요일 15:30~16:30분까지. 작은 채소가게가 열린다. 사진=큔인스타그램

큔이 운영하는 작은 채소가게를 찾은 사람들 사진=큔인스타그램
농장에서 바로 식탁으로 가는,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의 시작이네요.

해를 잘 받고 자란 채소를 뽑아 바로 먹는 일은, 정말이지 맛의 차원도 다르고 향의 차원도 달라요. “정말 맛있다”고 말할 때의 모든 요소가 압축된 맛의 지점이 거기에 있어요. 입과 몸이 놀라는 충격, 음식에 관한 충격이었죠.

채소에 진심이 되셨군요.

그 맛을 알아버리면, 헤어나오기란 쉽지 않아요(웃음). 모든 사람이 이 채소를 먹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채소의 맛을 안 것 외에도, 마르쉐@를 하면서 배운 세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다양성’이에요. 마르쉐@는 다품종 소량생산 농부를 키우는 시스템이에요. 물론 초반에는 대부분 텃밭 수준이었지만요. 그랬던 농부들이 점차 성장했고, 지금은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농부가 적어도 열 몇 팀은 됐어요.
채소 하나로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예전에는 완성형 당근만 받았다면, 지금은 여러 단계가 있어요. 먼저 싹이 났을 때 솎아낸 어린 당근의 잎이 와요. 그다음에는 조그만 아기 당근이 오고요. 더 지나서는 이파리가 억세지고 즙이 풍부해진 중간 크기의 당근이 오죠. 그다음이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완성형 당근이에요. 마지막으로 당근에 꽃이 피는데, 이것도 재료로 써요. 쓰려면 씨앗도 요리로 쓸 수 있어요. 각 단계의 맛이 전부 달라요. ‘다양성’은 식재료의 다양성이면서 맛의 다양성이기도 하죠.

채소의 세계가 깊어지네요.

네, 채소가 너무 재밌어요. 마르쉐@라는 시장 덕분이죠. 마르셰@에서 이룬 큰 변화 중 하나로 한국 토종 벼의 부활도 있어요. 한때 1451종에 달하던 토종 벼는, 일제식민지에 일제가 식량 수탈을 위해 농법이 까다로운 토종 벼 대신 개량종을 대규모 보급하며 30%만 남게 됐죠. 그 후에는 월등한 수확량을 자랑하는 개량종 통일벼가 1971년부터 전국 농가에 보급되며 토종 벼가 자취를 감췄어요. 어쩌다 어디 지방에서 한 분 정도 토종 벼를 키운다고 해도, 그건 판매용이 아니라 자급용이었어요.
‘우보농장’은 마르쉐@를 매개로 토종 벼를 선보여 품종을 늘려가기 시작했고, 지금은 250여 개 토종 벼 품종을 재배하고 있어요. 마르쉐@에서는 토종 쌀 맛을 테스트하는 워크숍도 꾸준히 해왔어요. 아마 저희가 토종 쌀을 가장 많이 지어본 사람들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일본의 쌀과 한국 쌀의 맛의 차이에 관한 이유도 조금은 알게 됐어요. 글로 써서 일본 매체에 싣기도 했죠.

김수향 대표는 수카라, 큔의 손님들과 함께 우보농장의 토종쌀 모내기를 같이 한다. 사진=큔인스타그램

모내기가 끝나면, 대형 가마솥에 토종 쌀로 밥을 지어 함께한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사진=큔인스타그램
노동 끝에 다함께 먹는 새참은 꿀맛이다. 사진=큔인스타그램
두 번째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요.

씨앗의 다양성이에요. 우리가 먹는 채소 대부분은 세계 5대 씨앗 회사에서 키운 것들이에요. 회사가 값을 올리면, 비싼 채소를 먹어야만 하죠. 하지만 저는 채소 맛을 알아버렸고 맛있게 먹을 권리를 빼앗기는 게 싫었어요. 평생 채소를 맛있게 먹으려면, 씨앗을 스스로 이어가는 농부가 있어야 해요. 실제로 농부 중에는 토종 씨앗을 발굴하고 연결하는 팀이 있어요.

돈 주고 산 씨앗은 1세대에서 끝이라고 알고 있어요.

씨앗의 형질이 유전되지 않는 F1 종자(first filial generation)예요. 크기와 맛을 바꾸고 많이 수확할 수 있도록 형질을 조작한 씨앗이죠. 2세대에 싹이 나지 않는 건 아닌데 보통 상품성이 없는 채소나 과일이 나와요. 계속 씨앗을 받으면 언젠가는 돌아온다고도 해요. 문제는 원래 자연이 주던 씨앗까지도 산업화한 시스템 안에 있다는 점이에요. 다품종 소량생산 농부라고 해서 씨앗을 사지 않는 건 아니지만, 동시에 씨를 이어가는 방법도 가능하죠.

세 번째는 무엇인가요.

농법의 다양성이에요. 농법에 따라서 채소 맛이 변하거든요. 농약을 안 쓰는 농법으로 키운 채소로 음식을 차린 워크숍을 한 적이 있어요. 밥을 먹고 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은 턱이 아프다는 거였어요(웃음). 천천히 미생물을 키우는 이 농법은 별도의 영양을 주지 않기 때문에 작물이 천천히 자라요. 그래서 섬유질이 강해져요. 맛도 당연히 다르고요.
농법의 다양성은 흙의 다양성이기도 해요. 흙 속에 어떤 미생물을 키우느냐에 관한 이야기죠. 흙을 키우는 것 자체도 발효예요. 잘 발효된 흙에서 자란 채소를 맛본 후에는 제 기준도 좀 달라졌어요. 종종 “어떤 채소를 먹어야 하나요?”라거나 “유기농이 나은지 무농약이 나은지”를 묻는 분들이 있는데, 요즘 저는 이렇게 말해요. “제대로 발효한 흙에서 자란 채소가 먹고 싶다”라고요.

흙을 발효하고 채소를 키워 수확하고 발효에 요리까지, 쉽지 않아 보이네요(웃음).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 전혀 아니에요! 제가 하는 일들은 철저히 저 자신을 위한 일이거든요(웃음). 무엇보다 저희는 엄청난 채소의 맛을 알게 됐잖아요. 기술을 논하기 이전에 정말 좋은 채소는 굽거나 찌기만 해도 맛있어요. 소스 몇 개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게 먹을 수 있죠. 좋은 채소에 의존하면서부터, 저는 요리하는 즐거움이 생겼어요.

 김수향 대표는 "좋은 흙에서 잘 자란 채소를 발효시키면 또 다른 채소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진 큔 인스타그램]

김수향 대표는 "좋은 흙에서 잘 자란 채소를 발효시키면 또 다른 채소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진 큔 인스타그램]

언젠가는 집 옆에 밭과 가게를 두고 가까운 거리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는, 그런 삶을 살고 싶으신 건가요.

맞아요! 저는 도쿄에서 태어났고, 오사카와 요코하마에서 자라서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잖아요. 도시에서만 살고 시골 생활은 해보지 않았으니 준비하는 거죠. 카페 수카라는 살고 싶은 미래로 가는 시작이었고, 제가 가는 길이 더 명확해진 게 큔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발효 작업은 큔에서 하지만, 채소를 말리는 건 할 수 없어요. 얼마 전에는 매실 100㎏을 차에 싣고 지방을 다녀왔어요. 그렇게 삼척이든 보성이든 채소를 말리러 가요. 서울에는 말릴 공간도 없고 공기도 좋지 않으니까요. 이런 일들이 자연에서 한꺼번에 이뤄지면 더 좋죠.

마을 안이나 내 집 앞에서 텃밭을 가꾸는 게 일상이었던 시절이 있었죠.

일본은 400~500년부터 분업화가 돼서 간장이든 술이든 기업의 제품이 유통된 반면, 한국은 저희 어머니 세대까지만 해도 집에서 채소를 기르고 발효 식품을 만드는 문화에서 자랐잖아요. 이런 문화가 남아 있는 나라가 많지 않아요. 지금으로써는 한국도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술을 직접 빚거나 김치와 장을 담글 수 있는 개인이 존재한다는 건 다행이죠.

조만간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목표라기보다, 영원한 과제가 하나 있어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흙을 닦는 일부터 시작해요. 그렇게 키운 채소를 손질하고 발효하고 요리하죠. 다 인건비예요. 유지가 쉽지 않죠. 재료의 질을 유지하면서 이 일을 계속하려면 어떤 방식이 가능한지 끝없이 고민하고 있어요.
제가 그리는 미래는 고용이라는 형태를 떠나서 관계 맺을 수 있는 팀으로 공간을 꾸리는 것이에요. 지금의 고용이라는 형태가 미래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수카라는 개인사업자였어요. 제가 그만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가게와 일이 사라지죠. 공동사업자는 달라요. 사람에 따라 형태가 바뀔 수 있지만, 이어갈 수 있는 지속가능성은 존재하니까요. 큔을 시작할 때 수카라의 매니저였던 정성은씨에게 공동사업자로서 운영하는 공간을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지속가능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요. 우리가 음식을 계속할 수 있는 키워드이자 가까운 미래의 목표죠.

김수향의 소울푸드 '콜리플라워 국' 🥣

좋아하는 이파리 채소와 좋은 조선간장만 넣어도 깊은 맛을 낼 수 있어요. 조선 시대 음식문화를 정리한 책 『정조지』에는 고구마잎을 넣고 조선간장으로 끓인 요리법이 나오죠. 근대 잎이나 고수를 넣고 끓여도 맛있어요."

재료
콜리플라워 잎과 대, 조선간장, 백후추

만드는 법
1. 콜리플라워의 잎과 대, 조선간장을 넣고 끓인다.
2. 끓어 오르면 백후추를 넣어 간을 맞춘 후 푹 끓인다. 오래 끓이면 감칠맛이 더 좋아진다.

이세라 쿠킹객원기자 cook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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