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수고했어' 토닥이는 나를 위한 요리

중앙일보

입력 2021.06.24 17:25

업데이트 2021.06.25 12:26

“고기를 먹어요.”

‘특별히 고단한 날에는 무슨 요리를 해 먹나요?’라는 질문에 의사 이재호에게 돌아온 대답이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애쓴 날, 고기가 생각나는 건 자연스럽다. 해 먹기에 고기 굽기만큼 간편한 요리도 없다. 하지만 이어 돌아온 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 올리브유를 두른 팬에 센 불로 볶아요. 고기가 익으면 잘게 썰어 놓은 당근, 양파, 마늘을 넣고 볶다가 닭 육수를 넣고, 육수가 1/4로 줄어들 때까지 약한 불에서 1시간가량 졸이면 감칠맛 나는 소스가 만들어지죠. 그리고, 전날 저녁에 시어링한 후 수비드 기계에 넣어 24시간 조리한 스테이크를 꺼내 접시에 올리고 소스를 사선으로 리듬감 있게 흘려주면, 완성되죠.”

시어링, 수비드 같은 전문 용어는 그렇다 치고, 저녁 한 끼를 먹기 위해 전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더욱이 그는 머리만 닿으면 곯아떨어진다는, 밥보다 잠이 더 고플 인턴이 아니던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 먹는 걸까. 그것도 혼자 먹는 밥을 말이다.

저에게 저녁은 오늘 하루도 고생한 나에게 주는 최고의 대접이거든요.”

최고의 대접. 맞는 말이다. 사실 그는 요리사다. 의대를 휴학하고 프랑스 요리학교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복학해 의대를 다니면서도 틈틈이 유명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지금도 새로운 요리법을 찾아보고, 자취방 주방에서 요리를 연구한다. 이런 그가 그를 위해 차린 만찬이니 이만한 대접도 없을 터.

의사이자 셰프인 이재호

의사이자 셰프인 이재호

대접의 사전적 정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땅한 예로써 대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을 차려 손님을 모시는 것’이다. 그의 저녁 식사에는 두 가지가 다 담긴다. 요리와 어울리는 음악을 선정하고, 맛을 배가시킬 와인을 고른다. 이 과정 모두가 나를 위해 최고의 예를 다하는 행위다. ‘잘했다’, ‘수고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가 나를 알아주고 토닥여주면 그만이다.

강릉으로 파견 나가 한동안 요리를 못 해 먹었다며, 요리가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그를 상암동에서 만났다. 마침 두 달여간의 파견을 끝내고 서울 자취방, 그의 레스토랑으로 복귀를 앞둔 차였다.

레시피가 상당한데(웃음),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세요.

많은 분이 프랑스 요리가 오래 걸리고 어렵다고 생각하시는데요. 프랑스 주방 용어에 미즈 앙 플라스(mise en place)라는 표현이 있어요. 줄여서 ‘미장’이라고 부르는데 요리를 시작할 수 있는 상태로 재료를 준비해두는 것을 말하죠. 이렇게 준비를 미리 해두면 실질적으로 요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0~15분. 플레이팅까지 고민한 시간 포함해서요.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맛있게 먹어도 1시간 정도면 식사가 끝나요.

프랑스식 자취요리 시저샐러드

프랑스식 자취요리 이베리코 뼈등심
프랑스식 자취요리 떡볶이
재료 준비 시간은 미포함이라는 말이죠? 그럼 미장은 어떻게 하나요.

일주일 단위로 무얼 먹을지 고민하고 계획을 세워요. 그리고 주말에 재료를 사와 손질하고 사용할 만큼 소분해 놓죠. 고기·해산물 등은 키친타월로 물기를 제거하고 진공으로 포장해 날짜와 재료명을 적어두고요. 대파는 흰 부분과 초록 부분을 분리해 통에 담아요. 요리 용도가 다르거든요. TV를 보면서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방울토마토나, 포도 등은 꼭지를 떼어서 먹을 만큼 나눠 보관해요. 과자 대신 먹으면 나를 호강시킨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어떤 의식을 하는 것 같아요. 혼자서도 잘 먹겠다는. 

행복하겠다는 의미가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제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원하는 환경에서 먹을 때 가장 행복하거든요. 그래서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하는 모든 과정이 저에게는 행복을 만드는 과정이에요.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 알고 그걸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전하다는 생각도 들죠. 잠시뿐이라도 말이죠.

의사·요리사 두 가지 공부를 다 하셨어요.

저도 두 가지 공부를 다 하게 될지는 몰랐어요. 처음 들어간 대학에서 졸업하고도 무얼 먹고 살지 고민하는 선배를 보고 다시 공부해 삼수 끝에 의대를 갔어요. 열심히 공부하면 예상되는 미래가 있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죠. 그런데 유급을 당한 거예요. 물론, 당시 프랑스 요리에 빠져 미식 활동을 열심히 하던 때라 공부에 소홀하긴 했지만, 유급은 생각도 못 했거든요.
갑자기 뜻하지 않은 방학이 생겼고 집에 있기는 민망해서 모터사이클을 타고 유럽여행을 한다는 계획을 세워 프랑스로 떠났어요. 파리부터 쭉 돌아볼 생각이었죠. 그런데 첫 여정부터 삐걱거렸어요.

처음 도착한 마을이 너무 낯선 거예요. 한국 사람은 처음 본다고 하고요. 음식으로나마 위로 삼아보려고 초밥집에 갔는데, 너무 맛이 없더라고요. 그 순간 갑자기 서러움이 확 밀려왔어요. 숙소로 돌아와 다시 짐을 꾸려 파리로 돌아왔어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저 멀리 에펠탑이 보이더라고요. 안도감이 느껴졌어요. 눈물도 조금 났던 것 같고요. (웃음)

그렇게 파리에서 사람들 구경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빈둥빈둥 놀다가 다시 학교에 복학했는데, 이게 내가 원했던 삶인가에 대한 회의가 매일 찾아왔어요. 인정받는 삶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의대 그만두고 요리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했죠.

쉽지 않은 선언이네요. 그런데, 지금은 의사죠?

인생이 그래요.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큰소리쳤으니 유학비를 달라는 말은 못 하겠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준비를 하는데 영장이 날라왔어요. 군대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싶어서 입대했어요. 의대를 다니다 입대해서 의무병 보직을 받았고, 한미군사훈련 같은 큰 훈련에 차출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의무병으로 복무하며 누군가를 치료하는 일이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꽤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죠. 다시 의사가 되고 싶은 거예요. 하하(웃음)

그럼 요리 공부는 언제 하신 거예요.

제대를 앞두고 복학 시점을 체크해보니 6개월가량 남더라고요. 그 기간에 다닐 수 있는 프랑스 요리학교를 찾다가 요리학교 에꼴 르노트르를 발견했죠. 5개월을 주5일 온종일 수업받는 집중 코스인데, 일정이 딱 맞더라고요. 어학은 전부터 틈틈이 준비해두었던 터라 제대와 함께 프랑스로 떠났어요.

이재호는 프랑스 요리학교 에꼴 르노뜨르의 단기 집중 코스로 학위를 받았다. [사진 이재호]

이재호는 프랑스 요리학교 에꼴 르노뜨르의 단기 집중 코스로 학위를 받았다. [사진 이재호]

보기에는 안정적인 삶 같은데, 들여다보니 파란만장해요.

안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인데, 인생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복학하고 심지어 마지막엔 의사국가고시도 한번 낙방했거든요.

그 무렵『프랑스식 자취 요리 :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책을 쓰신 거죠.

맞아요. 의사국가고시에 떨어지리라고는 사실 상상도 못 했어요. 결과적으로 봤을 땐 저의 공부가 많이 부족했던 것 같긴 하지만요. 한편으론 다른 걸 해볼 좋은 기회였어요. 평소 요리에 관한 책을 쓰고 싶었는데 운 좋게 집필 제안이 들어왔어요. 에세이인데, 요리와 사람, 관계에 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죠.

자취의 사전적 의미는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함’이다. 손수 밥을 지어 먹는다는 것은 삼시 세끼 매일 돌아오는 행복할 기회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며. 내가 나를 스스로 대접하고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삶은 늘 내가 뜻하는 대로 되지 않지만, 적어도 오늘 먹을 내 한 끼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먹을 것이다. 이 집에서 이 주방에서 나는 안전하게 행복하다. 

『프랑스식 자취 요리 :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첫 구절에서

책의 첫 구절이 인상적이었어요.

자취 요리의 본질은 끝없는 귀찮음과의 싸움이죠. 저 역시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도 있어요.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르듯 나를 떠올려 보면 귀찮음이 사라지죠.

자취방에서만 실력을 발휘하기엔 요리 솜씨가 아까워요.

주변에서 종종 비싼 돈 들여 괜한 짓을 했다는 말을 해요. 그런데, 저는 언제나 자신을 대접하는 일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더 멋진 일이라고 믿어요. 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요리하는 기쁨도 좋아요. 한 달에 한 번은 가족들과 정찬을 하려고 해요. 가족 정찬이 6시간 정도 걸리는데, 그만큼 이야기를 나누게 되죠. 저는 살면서 부모님과 이렇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필요한 말만 하니까 말 뒤에 숨은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죠. 지금은 마음도 보이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요리사로는 요즘 로컬 푸드에 관심이 커졌어요. 아무리 맛있게 요리해도 결국 원재료의 맛을 따라올 수는 없거든요. 지금은 바빠서 엄두가 안 나지만, 로컬 푸드에 대한 생각이 비슷한 젊은 셰프들과 연대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해보고 싶어요. 의사로는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었으면 해요. 병에 걸린 이후보다 건강할 때 건강을 잘 지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싶거든요. 요리사로서의 전문성과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잘 연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이재호의 요리 기본, 닭 육수

주말에 닭 육수를 만들어 보관해요. 떡볶이도 이 육수로 만들면 아주 훌륭한 요리가 되죠. 닭 뼈만 사용해도 되지만, 살까지 넣으면 더 맛있어요. 감칠맛을 내는 성분이 살코기에 더 많거든요."

닭 육수는 어떤 요리에도 풍미를 더해주는 육수다. [사진 이재호]

닭 육수는 어떤 요리에도 풍미를 더해주는 육수다. [사진 이재호]

재료
닭 한 마리, 당근(100g), 양파(80g), 대파 (한 줄기), 셀러리 (한 줄기), 마늘(1개), 정향(1개), 월계수(2잎), 소금, 후추,타임, 파슬리 조금

만드는 법
1. 닭 한 마리를 토막 내 끓이기 좋게 손질한다.
2. 당근·양파·대파·셀러리·마늘·정향·타임·월계수·파슬리잎 등 향미 채소를 준비한다.
3. 냄비에 찬물 1L와 손질한 닭과 채소를 넣고 소금·후추를 조금 넣고 4시간 이상 우려내어 500mL가 될 때까지 졸인다.
※끓이면서 거품을 제거하면 더 깔끔한 맛이 난다.
4. 육수를 조각 얼음통에 넣어 큐브 얼음 형태로 보관한다.

황정옥 기자 ok7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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