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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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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위성욱 기자 중앙일보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누군가 나 몰래 8개월째 우리 집에 살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경남 창원에서 실제 발생했다.

A씨(50대)는 지난해 10월쯤 본인 소유의 집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2개월 전쯤 집을 보러왔던 B씨(40대)가 자신의 집인 듯 냉장고 등 살림살이를 옮겨와 살고 있어서다. A씨는 여러 차례 “짐을 빼라”고 요구했지만 B씨는 “곧 나갈 거다. 죄송하다”며 차일피일 미뤘다고 한다.

하지만 B씨는 올해 2월까지도 집을 비우지 않았다. A씨는 지구대를 찾아가고 112에 신고도 했으나 강제로 B씨를 몰아낼 수 없었다. 경찰 등으로부터 “이런 상황이라도 집에 들어가거나 물건을 빼는 등 자구책을 쓰면 오히려 주거침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다.

집 주인 몰래 누군가 살고 있는 진해 한 주택. 위성욱 기자

집 주인 몰래 누군가 살고 있는 진해 한 주택. 위성욱 기자

이 과정에 A씨는 B씨에게서 올해 5월 9일까지 집을 비우겠다는 확인서를 받았다. 확인서에서 B씨는 ‘2020년 10월 5일 A씨의 승낙 없이 A씨 소유의 집으로 이사해 2021년 4월 27일 현재까지 살고 있다. 5월 9일까지 사용료 400만원과 전기세·수도세 등을 납부하겠다. 이를 지키지 않고 이사를 하지 않으면 민·형사상 책임을 지겠다’는 취지의 내용에 서명도 했다. 이후 B씨는 지난 5월 9일 이전에 자신의 어머니 이름으로 A씨 통장에 300만원을 입금했지만, 여전히 이사는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A씨는 확인서의 기한을 넘긴 며칠 뒤 경찰에 정식으로 사건을 접수했다. 경찰은 B씨를 건조물 침입 혐의로 입건했지만, B씨가 다른 주장을 하면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A씨는 2020년 4~7월까지 한 업체에 자신의 집을 세를 줬다. B씨는 경찰에서 “이 업체에 소속돼 일을 했는데 그쪽에서 ‘그 집을 임대했으니 사용해라’는 취지의 말을 듣고 이사를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당 업체 측은 B씨의 주장을 부인했으나 B씨가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서 경찰이 추가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다. 건조물 침입의 경우 고의성이 입증돼야 해서다.

이에 대해 원로 법조인인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 등은 이렇게 말했다. “주거(건조물)침입죄는 현재 살고 있든 살고 있지 않든 소유주의 주거에 대한 소유권 등 재산권까지 보장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며 “이 사건처럼 갑작스럽고 황당하게 몰래 주거에 침입해 온 사람의 주거까지 보장하기 위해 소유주의 주거권이 부정된다면 법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다.”

사건 발생 초기부터 이런 법 취지에 따라 사건이 처리됐다면 자신의 집인데도 소유주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무단 침입자는 자기 집인 양 8개월간 계속해 사는 황당한 일이 법치국가에서 계속됐을까.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법과 현실의 괴리를 좁히지 않는다면 이런 ‘숨바꼭질’은 어디서든 재연될 수밖에 없다.

위성욱 부산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