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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탄핵의 강, 조국의 강…먼저 건너는 게 승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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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경서 번역가 겸 영문학 평론가

박경서 번역가 겸 영문학 평론가

인간에게 강(江)의 존재 의미는 문명의 젖줄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건너가야 하는 관문일 때도 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잡기 위해서든, 정복을 위해서든 인간은 강을 건너야 하는 숙명을 지닌다.

카이사르의 루비콘강 결단처럼 #진보는 조국사태 통렬 반성하고 #보수는 박근혜 탄핵 멍에 벗어야

『구약성서』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교(異敎)의 도시 갈데아 우르(지금의 이라크 땅)를 떠나 유브라데(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가 됐다. 그 후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이집트)에서 수백 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뒤 그곳에서 탈출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요르단강)을 필사적으로 건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또 하나의 유명한 강은 루비콘(Rubicon)강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B.C. 44)는 로마 공화정 말기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Triumviratus)를 통해 로마를 통치했다. 카이사르가 로마의 속주(屬州) 갈리아(지금의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일대) 지방 총독으로 부임해 루비콘강 북쪽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원로원 보수파와 폼페이우스가 모의해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군대는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로마에 대한 충성의 맹세 차원에서 무장을 해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B.C. 49년 1월 10일 자신의 병사들에게 “주사위는 던져졌다(The die is cast)”라는 유명한 말을 외치고 무장한 채로 루비콘 강을 건넜다. 폼페이우스 일당을 물리치고 곧장 로마로 진격해 권좌에 올랐다. 오늘날 ‘루비콘강을 건너다’는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중대한 결심을 내린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건너지 못하고 있는 두 개의 ‘정치의 강’이 존재한다. ‘조국의 강’과 ‘탄핵의 강’이다. 2019년 가을 사생결단식으로 맞붙었던 광화문 집회와 서초동 집회에서 발원(發源)한 두 강은 한국 정치에 분열을 조장하며 여태 ‘분노의 강’이 되어 흐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젊은 초선의원들이 4·7 재·보궐선거 참패의 원인 중 하나로 ‘조국 사태’를 거론했지만, 이후에도 민주당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소신을 표출한 초선 의원들은 친문 강경파들로부터 ‘초선 5적’이라며 뭇매를 맞았다. 조국의 강을 건너려고 그들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가 지난 2일 국회에서 ‘조국 사태’에 대해 사과했지만, 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검찰개혁의 희생양”이라고 두둔했다. 같은 당 김남국 의원은 “굳이 민주당에서 사과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국민 정서와 한참 동떨어진 인식을 드러냈다.

지난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조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는 말을 했는데, 그 발언이 마치 주문(呪文)처럼 ‘문파’ 집단을 세뇌한 탓일까.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조국과 그의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고 믿는 한 그들의 머릿속엔 건너야 하는 ‘조국의 강’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조 전 장관이 최근 내놓은 『조국의 시간』이라는 책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그는 서문에 해당하는 ‘촛불시민들께 드리는 말씀’에서 “검찰·언론·야당은 합작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위한 조리돌림과 멍석말이를 시작했습니다. (중략) 저와 제 가족은 광장에서 목에 칼을 차고 무릎이 꿇린 채 처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이 책의 발간으로 ‘조국의 강’은 이제 ‘건너갈 수 없는 늪’이 된 셈이다.

반면 국민의힘은 ‘탄핵의 강’을 절반 정도 건너간 듯하다. 지난해 12월 김종인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에 대해 사과했을 때나, 지난 3일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 합동연설회에서 당시 이준석 후보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정당했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당시 ‘태극기 부대’를 위시한 보수 우파들은 반대나 저항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준석 후보가 국민의힘 당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탄핵의 강’ 건너기는 탄력을 받는 모양새다.

한국정치가 발전하려면 ‘조국의 강’과 ‘탄핵의 강’은 반드시 건너가야 한다. 강 건너에는 굴절된 한국 정치를 변화시켜줄 화합과 상생이라는 희망의 빛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의 루비콘강’을 먼저 건너는 결단을 국민 앞에 보여주는 세력이 차기 대선의 길목을 선점할 것이다.

박경서 번역가 겸 영문학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