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워킹그룹 'conclude' 합의해놓고 "재조정"이라는 美, 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남북 협력 사업과 관련한 대북 제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한ㆍ미 워킹그룹의 종료를 두고 한ㆍ미가 다른 표현을 썼다. 한국은 ‘종료’라는데, 미국은 ‘재조정’이라고 했다.
외교부는 22일 오전 7시 출입기자단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 “21일 한ㆍ미 북핵 수석대표 협의시 기존의 워킹그룹을 종료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23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는 모습. 연합뉴스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23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는 모습. 연합뉴스

하지만 미 측 수석대표인 성 김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약 9시간 뒤 국내 외교안보 인사들과 만나 워킹그룹에 대해 이야기하며 종료(termination)가 아니라 재조정(readjustment)으로 표현했다고 복수의 참석자들은 전했다. 종료와 재조정은 전혀 다른 뜻이라 양국이 서로 다른 표현을 쓴 데 대해 의문이 제기됐다.

한국 외교부는 "종료하기로" 표현 차이 #국무부 "이름이 뭐가 됐든 조율이 중요" #'간판' 바뀌어도 제재 논의 '메뉴' 그대로 #경협 차질은 워킹그룹 아닌 北 거부 때문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도 22일(현지시간) 정례 브리핑에서 워킹그룹을 종료(terminate)하는 데 합의한 게 맞느냐는 질문에 “한국을 포함한 동맹과의 협의 및 조율은 우리의 대북 정책 이행에서 핵심적 부분”이라며 “우리는 이런 관여를 계속할 것이며, 전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만 답했다.

이어 “이름을 뭐라고 붙이든(Whatever we label), 어떤 외교적 메커니즘이든 우리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정책 목표를 위해 동맹과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워킹그룹의 종료 여부에 대해 즉답하진 않고, 지속적 조율을 강조한 셈이다.
국무부 대변인은 “전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 대상이 동맹과의 협의 및 조율인지, 워킹그룹인지 되묻는 중앙일보의 질문에도 같은 답변만 반복했다.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23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는 모습. 뉴스1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23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는 모습. 뉴스1

이와 관련, 실제 양국이 수석대표 협의에서 합의한 용어는 ‘결론짓다’ ‘마무리하다’ 등으로 해석되는 ‘conclude’였다고 한다. 외교부가 밝힌 ‘종료’에 가깝다.
이는 그렇다면 미국은 왜 다른 식으로 표현했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외교 소식통은 “미국은 ‘워킹그룹’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활동은 종료했지만, 워킹그룹이 다루던 제재 등의 의제는 계속해서 다룰 것이라는 취지로 재조정이라는 표현을 쓴 것 같다”고 말했다.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이 “이름을 뭐라고 붙이든”이라고 한 것 역시 협의체 이름과 상관 없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워킹그룹에서 해온 논의는 계속 할 것이란 뜻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워킹그룹을 남북 협력을 가로막는 대명사처럼 여기는 국내 여권과 진보 진영 중심의 비난 여론을 의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워킹그룹이 대북 인도적 지원마저 막는다며 악마화하는 분위기까지 있으니 ‘간판’은 바꿔 달았지만, 기존에 팔던 ‘메뉴’를 없앤 건 아니라는 뜻이다.

노규덕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성 김 미 대북특별대표가 21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ㆍ미 북핵 수석대표 협의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노규덕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성 김 미 대북특별대표가 21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ㆍ미 북핵 수석대표 협의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일각에선 문재인 정부가 제재 완화를 대북 유인책으로 활용하려 하는 데 대한 우려가 나오자 미국이 제재 준수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다시 확인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달 한ㆍ미 정상 공동성명에서 “대북 접근법이 완전히 일치되도록 조율하기로 합의했다”는 문구를 포함한 것 역시 한국의 과속을 경계하는 의미도 있다는 해석이다.

다만 양측이 이미 종료에 합의한 마당에 표현의 차이를 두고 한ㆍ미 간 이견이 있는 것처럼 비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 역시 기존에 워킹그룹에서 하던 제재 관련 논의를 향후에는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종료’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표현 차이에 대한 논란이 일자 외교부 당국자는 “기존 협의체의 기능은 재조정을 통해 새로운 협의체에 반영될 것”이라는 취지의 추가 설명을 내놓기도 했다.

사실 정부 안팎에는 워킹그룹에 대해 오해가 많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관련 사정에 밝은 소식통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간 워킹그룹을 통해 제재 면제가 이뤄진 남북 간 협력 사업은 10여건이 넘는다. 미래에 협력이 이뤄질 경우에 대비해 미리 받아놓은 면제 건들도 많다. 한국의 제재 면제 요청을 미국이 거부한 적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제재 면제를 활용해 실제 사업이 이행된 건은 이 중 4분의1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워킹그룹이 막아서가 아니라 북한이 남북 협력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문에 워킹그룹 논의 자체도 상당 기간 ‘개점 휴업’ 상태였다.

외교 소식통은 “워킹그룹이 했던 역할은 남북 경협의 걸림돌보다는 과속방지턱이나 안전판에 가깝다. 이름을 달리 해도 이런 역할을 하는 양국 간 협의체는 꼭 필요하다”며 “기본적으로 미국은 북한의 의미 있는 행동 변화 없이는 제재 완화도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워킹그룹 종료라는 게 대북 유인책이 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