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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요강을 이삿날 옮길 특별한 짐으로 남겨놓은 까닭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97)

딸이 동영상 하나를 보여주며 조잘댄다. 독신인 유명 연예인이 엄마와 함께 살고 싶은 실버타운을 방문한 이야기다. 형편이 되면 엄마도 그런 곳에서 사람 스트레스받지 않고 맘 편하게 살면 참 좋겠단다.

세상이 변해 공동체 의식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곳에서는 나 홀로, 간섭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건 하지만 노동(밥 차려 먹고 빨래하고 청소하는)일은 안 한다. 그런 환경에 살 수 있게 해주는 쪽이 로봇인지, 사는 사람이 로봇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쌈박하다. 여성이라면 삼시 세끼 신경 안 쓰고 사는 타운 세상이 부럽겠다.

‘부러워도 돈이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마’하고 최면을 걸어서인지 아직은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웃고 투덕거리고 정 나누며 사는 공동체 마을이 나는 좋다.

봉화에서 안동으로 이사한다는 건 지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옮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삿짐 속에 숨어 따라가는 가택신이 내리막길에 복 짐을 내려놓고 미끄럼 타듯 까불며 가다 보니 쌓인 복이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사진 pixabay]

봉화에서 안동으로 이사한다는 건 지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옮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삿짐 속에 숨어 따라가는 가택신이 내리막길에 복 짐을 내려놓고 미끄럼 타듯 까불며 가다 보니 쌓인 복이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사진 pixabay]

서울 고급 아파트에 살다가 부모님이 살던 시골 고택을 아름답게 수리해 이사 내려온 지인이 이번에 차고를 지었다. 차고 그림을 함께 그리면서 참 즐거웠다. 방향을 이리저리 옮겨보며 드디어 차고 양쪽에 창고 한 칸과 넓은 툇마루 그림이 완성되었다. 동네 구경 오신 분들이 한마디씩 했다.

"잘 지었네, 본체와 잘 어울리구먼. 이젠 여기서 모여 더위도 피할 수 있고 참 좋네."

모두 좋은 말씀과 덕담을 하지만, 어느 동네나 매의 눈으로 관찰, 지적하시는 분이 계신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차고가 훤히 보이는 것이 이제껏 들어온 복을 차가 들락날락하며 다 날려버리는 형상이라."

이 얘기를 듣고 지인은 며칠 밤잠을 설쳤다며 방문한 우리에게 푸념한다. 지나가는 과객이 던진 말도 아니고 오며가며 늘 만나는 어른이니 더 심란했을 것이다. 우리 인생에 ‘복’자 보다 더 중요한 언어가 어디 있나. 돈 들여 지은 차고가 갑자기 애물단지로 보이는 것이다. 힘들게 쌓아 올린 복이 눈에 안 보이게 사라지고 사람까지 다칠 상상을 하니 스트레스에 잠이 안 올만 했다.

문득, 시골살이를 끝내고 안동으로 이사를 결정한 때가 생각났다. 모두들 섭섭함과 격려의 마음을 담아 정을 나누었다. 그런데 한 어르신이 생뚱맞은 말씀을 하시는 거다. “하필 안동 쪽인가? 이 집에서 돈 벌어 안동으로 이사 나간 사람들은 모두 망했어. 거 왜 안동 입구로 나간 갑수네, 을수네도 그렇고. 병수네 있잖은가. 왜냐하면 지역적으로다가. 어쩌고저쩌고….”

해석하면 봉화는 지대가 놓은 곳인데 거기서 쌓은 재산이 지대가 낮은 안동 쪽으로 내려가면 이삿짐 속에 숨어 따라가던 가택신이 내리막길에 복 짐을 내려놓고 미끄럼 타듯 까불며 가다 보니 쌓였던 복이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형상이라는 거다. 하하하.

옛 어르신의 고된 삶이 애환 스토리가 되어 차고 넘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튼 안동으로 이사가 망해버린 동네 사람의 이야기는 마치 경제기획원의 집계지표보다 더 정확도를 내세워 내 마음에 들어와 앉아버렸다. 어른이 생각 없이 한 허튼소리라 해도 이미 마음에 닿아버린 말은 잊히지 않고 머리를 맴돌았다. 그 어른도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개똥철학 같은 풍수지리를 생각했을 텐데 말이다. 훗날 내가 망해 점집 가서 물으면 “어허이~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서쪽으로 갔구나”하며 점괘를 흔들 것 같아 어수선한 마음으로 날을 샜다.

이사하기 전날 두 대의 트럭에 짐을 가득 실어 안동으로 보내고 이삿날엔 남겨놓은 특별한 짐을 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쌀자루와 소금자루, 전기밥솥, 그리고 요강’이다. 우리는 이들 물건을 차에 싣고 봉화를 출발해 영양 청송을 거쳐 안동에 도착했다. [사진 pixnio]

이사하기 전날 두 대의 트럭에 짐을 가득 실어 안동으로 보내고 이삿날엔 남겨놓은 특별한 짐을 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쌀자루와 소금자루, 전기밥솥, 그리고 요강’이다. 우리는 이들 물건을 차에 싣고 봉화를 출발해 영양 청송을 거쳐 안동에 도착했다. [사진 pixnio]

이삿짐을 날라주기로 한 사위에게 우울한 표정으로 고민을 말했더니 웃으며 답한다.

“하하, 어르신 말에도 일리가 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연구해 볼게요.” 그러더니 이사하기 전날 교란작전이라며 두 대의 트럭에 짐을 가득 실어 안동으로 보내고 이삿날엔 남겨놓은 특별한 짐을 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쌀자루와 소금자루, 전기밥솥, 그리고 요강’이다. 우리는 봉화를 출발 영양을 지나 청송으로 아리랑 고개를 넘고 넘어 안동에 도착했다. 사위가 말했다.

“이제 걱정 없어요. 잡신은 미끄럼타면서 다 날아 가고 대표 가택신은 울퉁불퉁 험난한 산길에 자기 복 안 놓치려고 꼭 끌어안고 왔을 거예요. 하하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 어이없는 이야기가 민망하지 않게 가택신을 챙긴 사위의 행동이 얼마나 고맙던지. 이 일은 생각하면 할수록 재밌고 즐거웠던 이사 사건이다.

인생살이 살다 보면 정답보다 해답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해답은 그때그때 달라서 때로는 훈수 두듯 이웃이 풀어 주기도 한다. 우울해 하는 지인 앞에서 함께 구경 간 두 사람은 간단하게 해결되는 ‘복 지킴용’이라며 랩 하듯 흥얼흥얼 노래했다.

“자바라, 브라인드, 제주도식 나무걸이, 파티션, 나무판, 천지삐깔 가림막…. 문제없어요.”

적당한 스트레스 받고 풀며 더불어 사는 게 즐거운 인생이라 말하면서도 딸이 보낸 실버타운 동영상은 가끔은 은둔자처럼 살고 싶은 내 마음을 유혹한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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