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현곤 칼럼

정권 말, 저금리의 유혹

중앙일보

입력 2021.06.22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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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유동성이 과도하다고? 헛소리하지 마. 대통령 한 번만 하고 그만두고 싶진 않다고.” 1972년 재선에 도전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아서 번스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을 불러 호통을 쳤다. 대선에서 이겨야겠으니 금리 인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였다. 금리 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인기 없는 정책이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과 복지 확대로 돈을 많이 찍는 바람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에 직면했다. 금리를 올려 돈줄을 조여야 했지만, 닉슨이 막은 것이다. 후유증은 오래갔다. 73년과 79년 두 차례 오일쇼크가 겹쳐 10년간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 물가 급등) 암흑기를 겪었다. 번스는 최악의 연준 의장으로 기억된다.

72년 닉슨, 재선 욕심 금리 안 올려
2002년 DJ, 유동성 방치해 부작용
문 정부도 돈 풀며 부동산급등 자초
대선 의식해 저금리 놔두면 큰 위기

국내서도 뼈아픈 실패 사례가 있다. 김대중 정부 마지막 해인 2002년. 미분양 아파트가 사라지고, 물가가 치솟았다.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그해 9월 국정감사에서 “금리 인상 외에는 과잉 유동성을 흡수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금리를 올리지 않았다. 전윤철 경제부총리는 “금리를 올리면 국민과 기업에 심리적 패닉을 줄 수 있다”며 대놓고 금리 인상에 반대했다. 김대중 정부는 임기를 고성장으로 마무리하려는 욕심, 대선 승리를 위해 호황을 이어가려는 욕심이 앞섰다.

2002년 경제는 과열을 빚으며 7.4%나 성장했다. 대선도 여당의 노무현 후보가 이겼다. 모든 게 뜻대로 된 것 같았지만 그 대가는 엄청났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검찰개혁, 행정수도 이전 같은 거창한 개혁과제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정권을 흔드는 균열이 엉뚱하게 경제에서 생기는 줄은 몰랐다. 신용카드 대출이 급증하면서 카드대란이 터졌다. 신용불량자가 속출했다. 이어 유동성이 부동산을 덮쳤다. 노무현 정부는 영문도 모른 채 5년 내내 부동산 광풍과 싸워야 했다. 대출을 막고, 1주택자까지 투기꾼으로 몰아세우며 법석을 떨었다. 소용없었다. 문제는 유동성이었다. 그런데도 금리를 더 내렸다. 금리 인상으로 돌아선 게 집권 3년이 다 돼가는 2005년 10월이었다. 미국보다도 금리가 낮았다. 당연히 부동산은 계속 올랐다.

유동성의 달콤한 유혹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미국은 자산시장이 꿈틀대자 2018년까지 금리를 줄기차게 올렸다. 우리는 머뭇거렸다. 2018~2019년 금리가 다시 미국보다 낮아졌다. 시중에 유동성이 넘쳤다. 설상가상, 지난해 코로나 사태로 금리를 더 내렸다. 경제는 엉망인데, 집값과 주가가 치솟은 이유다. 2030세대가 집 없는 벼락거지가 된 배경도, 빚투·영끌하며 암호화폐 투기판에 뛰어든 배경도 결국 유동성이다.

공짜 점심은 없다. 올 들어 전 세계에 인플레이션이라는 섬뜩한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목재·철광석·구리값이 사상 최고치다. 전 세계 식품 가격은 지난달 40% 급등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런 상승세는 70년대 이후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닉슨과 번스의 합작품, 70년대의 악몽을 끄집어낸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서민에게 특히 나쁘다. 서민은 부동산·주식·금 등 변변한 자산 없이 약간의 현금 수입으로 버틴다. 화폐가치가 하락하면 충격을 고스란히 받는다. 인플레이션이 호주머니의 몇푼을 훔쳐가는 셈이다. 식료품비·전월세값 상승의 충격을 가장 많이 받는 계층도 서민이다.

늦기 전에 금리를 올려야 한다. 이자 부담이 늘고, 한계기업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부채가 많은 정부와 기업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렇다고 저금리를 놔두면 빚은 더 늘어난다. 이미 가계·기업 부채는 4000조원, 정부 부채는 1000조원으로 한계상황이다. 대선을 앞둔 정부는 돈줄을 조일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 기획재정부는 “물가상승은 공급 부족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며 인플레이션 경고에 귀를 막았다. 문 대통령은 “재정의 역할이 막중하다”며 임기 마지막까지 재정에서 돈을 풀겠다고 공언했다. 72년 닉슨 정부의 길, 2002년 김대중 정부의 길을 걷겠다는 뜻이다.

한은은 늘 그렇듯 노회하고 모호하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달 말 “연내 금리 인상 여부는 경제 상황의 전개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한은이 연내 금리 인상을 시사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의 발언을 찬찬히 보라. 금리를 올리겠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분명치 않다. 얼마 전 이 총재는 “완화적 통화정책을 적절한 시점부터 질서있게 정상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또한 불투명하고 교묘한 메시지다. ‘적절한 시점’이 언제인지 알 길이 없다. 기본적으로 한은은 정부와 반대로 움직여 본 적이 없다. 설령 금리를 올리더라도 정부와 연준·여론의 눈치를 보다가 기준금리(현행 0.5%)를 한두 차례 0.25~0.5%포인트 찔끔 올릴 것이다. 이 정도로는 과잉 유동성을 해결할 수 없다.

다들 냉정해져야 한다. 금리를 올리면 작은 위기가 온다. 금리 인상을 미루면 큰 위기가 온다. 내년 초 대선 승리를 위해 유동성 파티를 밀어붙이려는 정부의 정치적 계산과 한은의 소극적 방조가 어우러지면 위험천만하다. 다음 정권은 설거지하다 날 샐 게 틀림없다. 72년 미국과 2002년 한국 같은 실패를 더는 겪고 싶지 않다.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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