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돌아오는 기차역, 인생 닮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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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77)

‘저기선 다들 그 말들을 하잖아요. 뭐만 찾아주면 그러잖아요. 고, 고맙다고, 고맙다고.’ -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대사 중.

인기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 동백이는 공기업 직원, 그것도 기차 역무원이 되고 싶다고 한다. 기차역 분실물센터에서 제일 많이 하고 듣는 말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며 그런 말을 매일같이 듣는 기분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좋겠다고 한다.

유독 드라마나 영화, 또는 소설에는 기차역이 자주 등장한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는 네 자매의 새로운 앞날을 약속하는가 하면 나의 최애영화인 ‘첨밀밀’의 시작과 끝은 기찻속 앞뒤로 앉은 주인공들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또 소설 『아리랑』이야말로 일제강점기와 기차에 얽힌 에피소드가 깊고 아프게 펼쳐진다.

그 밖에도 수없이 많은 영화와 문학작품에선 기차, 기차역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곤 한다. 누군가를 보내는 아쉬움은 멀어져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또는 새로운 출발이나 희망도 역시 기차에 올라타거나 기차에서 내리며 시작되곤 한다. 굳이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도 기차와 관련된 추억 몇 가지쯤은 간직하고 있을 게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간이역 '춘포역'. 아이패드, 프로크리에이트. [그림 홍미옥]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간이역 '춘포역'. 아이패드, 프로크리에이트. [그림 홍미옥]

가장 오래된 간이역, 춘포역이 품은 이야기

요즘 인기몰이 중인 ‘손현주의 간이역’에는 아직도 운영되고 있을까 싶은 전국의 작은 역들이 등장한다. 간이역이 들려주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주 정겨울 뿐만 아니라 쏠쏠한 재미와 웃음까지 실어나른다.

방송 덕분에 넣어두었던 기차의 추억이 시도 때도 없이 걸어 나온다. 어릴 때부터 유독 차멀미가 심했던 터라 버스는 말할 것도 없고 택시조차 큰 각오를 하지 않고선 타지 못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신경이 무뎌진 탓인지는 몰라도 언제부턴지 차멀미는 자취를 감추긴 했다. 하지만 기차는 달랐다. 내 기억 속에 기차를 타면서 멀미라는 고약한 강적을 만난 적은 없었다. 내가 살던 곳엔 사통팔달로 뻗은 기차역이 있어 당연스레 기차는 나의 발이 되어 함께 소녀가 되고 어른이 되었다.

춘포역은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사진 익산시]

춘포역은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사진 익산시]

이번 그림 속의 간이역은 전라북도 춘포역이다. 행정구역으론 익산시 춘포면이라 하지만 시내와는 한참 떨어진 전형적인 시골이다. 한도 끝도 없는 너른 들판에 씩씩하게 서 있는 춘포역! 이래 봬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이다. 무려 1914년에 지어진 세월이 겹겹이 쌓인 기차역이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폐역이 되어 빠르게 지나치는 기차를 그저 바라보고 있다.

짐작하다시피 너른 김제평야의 기름진 곡식 물결은 일제강점기에 수탈의 현장이 되었다. 저렇게 소박하고 수줍은 모습으로 서 있던 춘포역은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한때는 ‘대장촌역’이라고 불렸던 춘포역 인근엔 일본인들이 대규모 농장을 경영했다고 한다.

수확한 곡식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던 수탈의 현장은 익산시의 노력으로 역사를 되새기고 바로잡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엔 간이역을 찾아 스케치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부쩍 늘어나고 젊은이들의 여행지로 사랑받고 있다는 좋은 소식도 들려온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기차역은 인생과 닮아

어딘가로 오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기차역. [사진 홍미옥]

어딘가로 오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기차역. [사진 홍미옥]

요즘도 기차를 자주 이용한다. 예전에 비하면야 잠깐 졸 틈도 없이 도착하는 바람에 긴장은 필수다. 자칫하면 다음 역까지 갈지도 모르니깐. 언제나 설레는 기차여행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코로나로 인해 기차여행의 백미인 열차 식당 이용과 도시락 맛은 볼 수도 없게 됐다는 것이다. 하기는, 기막히게 계산을 하던 홍익회 아저씨가 팔던 손수레 속의 조미오징어와 감귤 주스캔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누군가는 새로운 꿈을 향해 떠나고 또 누군가는 일상으로 돌아오는 우리네 인생 같은 기차역.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그것마저도 우리와 닮아있다. 오늘도 기차는 힘차게 달린다. 마침 다가오는 6월 28일은 철도의 날이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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