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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새우에 절한 '할리 타는 여교수'···그가 텃세 뚫은 A4 1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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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중식 최초 여성 셰프로 통하는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서울 후암동 자신의 연구소인 계향각에서 포즈를 취했다. 아래 울릉도 질주 움짤과 동일인물. 김상선 기자

중식 최초 여성 셰프로 통하는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서울 후암동 자신의 연구소인 계향각에서 포즈를 취했다. 아래 울릉도 질주 움짤과 동일인물. 김상선 기자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울릉도를 질주하는 신계숙 교수. 울릉도=전수진 기자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울릉도를 질주하는 신계숙 교수. 울릉도=전수진 기자

“모~홀래 사랑했던 그 사라~암 / 또 몰래 사~하랑했던 그 남자.”  

울릉도 중에서도 벽지 산골인 이곳에 지난 2일 노래 한 곡이 우렁차게 울려펴졌다. 구성진 가락을 따라가보니,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교수. EBS의 핫한 맛기행 프로그램인 ‘맛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원탑 호스트이기도 한 그가, 울릉도를 찾아 명이밭 한가운데서 절로 흥이 나서 노래를 열창하고 있었다. 남성적 로망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모터사이클인 할리 데이비슨을 배에 싣고 울릉도까지 맛을 찾아 여행을 나선 그를 따라가봤다.

할리 타는 ‘괴짜’ 여교수 신계숙 #남성 텃세 뚫고 중화요리 셰프로 #중년에 기타·색소폰도 도전 수준급 #“뜨겁게 한 다음 차갑게 담금질 #양장피 요리가 내 청춘과 꼭 닮아”

명이밭 한 가운데의 울릉도 자연인, 정헌종씨와 신계숙 교수. 울릉도=전수진 기자

명이밭 한 가운데의 울릉도 자연인, 정헌종씨와 신계숙 교수. 울릉도=전수진 기자

신계숙 이름 석자는 곧 ‘자유’다. 지천명(知天命)은 지난 나이. 그럼에도 그는 하고 싶은 것은 일단 하고 본다. 그에 따르는 노력과 용기, 땀을 기꺼이 대가로 지불하면서. 화교가 아닌, 그것도 여성으로서 중화요리계에 몸을 담은 첫 한국인기도 하다. 지금도 일부에겐 낯선 ‘비혼(非婚)’을 14살의 나이에 결심했다. 그 어느 틀에도 자신을 가두지 않는 것. 이것이 인간 신계숙의 삶의 철학이다.

방송인 유재석 씨가 진행하는 방송에서도 색소폰부터 할리 데이비슨까지 도전의 개인사(史)를 풀어놓으면서 일반 대중에도 더욱 친숙해졌다. 젊은 여성 사이에선 멋진 언니인 걸크러시의 전형으로 인기가 독보적이다.

울릉도 행 직전, 그가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서 운영하는 요리 연구소인 일명 ‘계향각’을 찾았다. 세월의 더께가 선연한 웍이며 화구 뒤로 그가 직접 말리는 어란 등 식재료가 풍성했다. 지금이야 중화요리 불판의 달인이지만, 설움도 많이 겪었다. 프로의 주방이 으레 그렇듯, 텃세가 심했다. 중식 요리의 대가 이향방 선생의 향원에서 일을 배웠는데, 텃세의 연속이었다. 그는 “주방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수도꼭지는 건드리지도 말라고 하더라고요”라며 씩 웃었다. 물러설 신계숙이 아니다. 그는 곧 매일 주방의 큰오빠격인 이들에게 커피를 손수 타서 갖다 주고 닭발 발톱 깎기 등, 자신의 해야할 바를 성실히 묵묵히 해나가며 텃세를 무너뜨려갔다. 비결은 뭐였을까.

“그냥, 주방이 좋더라고요. 이겨내야 한다? 그런 생각 없었어요. 요리라는 게 내 신체 일부를 빼어내서 남을 먹이는 일이잖아요. 그 일이 좋기도 했고, 내게 경제적 자유도 가져다 줄 수 있었던 거죠. 힘들긴 했죠. 고뇌도 많았고. 내 성공은 내 눈물을 먹고 자란다고 생각해요.”  

요리할 때도 세상 진지한 신계숙 교수. 김상선 기자

요리할 때도 세상 진지한 신계숙 교수. 김상선 기자

중국 북송시대 시인 소동파의 이름에서 유래한 삼겹살 요리 ‘동파육’. 신계숙 교수의 버전은 유독 부드러워 '티라미수 동파육'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서정민 기자

중국 북송시대 시인 소동파의 이름에서 유래한 삼겹살 요리 ‘동파육’. 신계숙 교수의 버전은 유독 부드러워 '티라미수 동파육'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서정민 기자

텃세를 뚫고 모든 주방 식구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된 그는, 더 큰 세상을 보기로 결심했다. 월급을 모으고 모아 홍콩으로, 중국으로, 대만으로 미식 여행을 다녔다. 맛을 알아야 그 맛을 낼 수 있고 그 맛을 넘어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명품 지갑은 잃어버리면 그만 아니냐”며 “내겐 지식과 경험이 더 중요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신계숙 만의 요리’를 찾아 독립을 했고, 소형차에 요리도구며 식재료를 넣고 방방곡곡 가가호호 다니며 요리 수업도 했다. 그가 ‘인생의 담금질’이라 부르던 시절이다. 그는 “구박도 받고 고생도 해야 더 단단해지더라”며 “뜨겁게 한 다음 차갑게 담금질을 해서 완성되는 요리인 양장피가 내 청춘과 꼭 닮은 것 같다”고 했다.

훌륭한 요리인은 적지 않다. 신계숙이 신계숙인 이유는 그가 삶의 다양한 영역으로 스스로를 두려움없이 확장해나갔다는 점이다.

갱년기로 인한 열 때문에 대중교통 이용이 힘들어지자 스쿠터로 시작해 할리 데이비슨을, 남자도 힘들다는 1200cc로 몰기 시작했다. 이젠 달인의 경지다. 기타와 색소폰에도 도전, 이젠 꽤 수준급이다. 그러면서도 “멋있어 보이잖아”라며 별일 아니라는 듯 호탕하게 웃어넘긴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도 걸렸다. 오해도 받는다. 그는 “겉멋만 들어서 할리 타는 거 아니냐는 댓글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내가 내 스스로 벌었고 해냈다”며 “내 결핍이 내 근성을 길러냈다”고 말했다.

울릉도에서도 그의 철학과 근성은 빛났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위한 청와대 만찬에 등장해 유명해진 일명 ‘독도 새우’를 맛보러 가선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새우님, 고맙습니다”라고 꾸벅 절을 하기도 했다. 해안도로부터 산지까지,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질주하는 모습은 진지 그 자체였다.

울릉도 자연인 정헌종 씨는 “신 교수님과 함께 있으면 웃음과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며 “치열하게 삶을 돌파해온 사람이 가진 이의 아우라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울릉도에 동행한 그의 절친인 육경희 희스토리푸드 대표 역시 “친구이지만 존경을 하게 되는 인물”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울릉도 편은 21일 밤 EBS ‘맛터사이클 다이어리’ 편에서 멋진 풍광은 물론, 신 교수의 노래 솜씨와 함께 즐길 수 있다. 한국식 전통 순대 연구에 매진해온 육 대표와 신 교수의 최근 ‘맛터사이클 다이어리’ 에피소드 역시 방송에서 화제가 됐다.

신 교수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모든 걸 할 에너지와 생각은 어떻게 나느냐고. 그는 싱긋 웃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많이들 물어보는데 저는 간단해요. 하고 싶은 게 생기면, A4 용지를 꺼냅니다. 이걸 해서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을 적어보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뒤, 예스라는 답이 나오면 바로 돌진합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하고 싶은 거가 있다면 열과 성을 다해서 일단 해 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모두 화이팅!”  

울릉도=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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