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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설영의 일본 속으로

"세계적 기업 왜 안나오나" 도쿄대 총장도 나서서 "창업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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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창업가 교육에 힘을 쏟아, 세계에서 활약할 수 있는 스타트업 기업을 만들겠습니다.”

日 대학가에 '스타트업 붐' #1950년대 이후 창업 정체 #1조2천억 산·관·학 지원책도

지난달 17일 후지이 데루오(藤井輝夫) 도쿄대학 총장은 취임 일성으로 ‘창업가 교육’을 언급했다. 오는 7월 개설되는 ‘기업가 정신 교육 디자인 기부강의’는 통신 대기업인 KDDI와 인공지능(AI) 분야의 교수가 참여하는 벤처 지원회사, 벤처 캐피털 등이 힘을 합쳤다. 후지이 총장은 취임사에서 “도쿄대학이 창업에 관여한 기업이 현재 약 400개인데 2030년엔 700개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2020년 대학발 창업 기업

2020년 대학발 창업 기업

일본 대학가에 ‘창업(스타트업) 붐’이 일고 있다. 경제산업성이 지난달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2020년 대학 내 창업 기업은 200개다. 대학기업의 누적 숫자는 총 2905개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대학 창업 순위는 도쿄대, 교토대, 오사카대, 쓰쿠바대 등 국립대가 상위권을 차지했다. 지방 대학들의 약진도 눈에 띈다. 교토의 리쓰메이칸(立命館)대는 2020년 한 해 동안 학내 기업 61개가 출범했다. 전년도에 비해 2.5배나 늘어난 규모다. 2019년 대학이 소니 그룹과 제휴해, 창업 초창기 자금을 지원해주는 10억엔 규모의 펀드를 설립했다. 도쿠시마(徳島) 대학은 지역은행인 아와(阿波)은행과 손잡고 10억엔 규모의 펀드를 설립했다. 지난해엔 생물 유전자 편집회사, 식용 귀뚜라미 양식 회사 등 2곳에 투자가 이뤄졌다. 도쿠시마 대학 관계자는 “연구자에게 창업을 장려해 지역의 신산업을 육성하고, 그 자금을 다시 대학에 환원시키는 시스템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아예 창업 교육을 내건 4년제 대학도 생겨났다. 지난해 4월 개교한 iU(정보경영 이노베이션 전문직 대학)는 영어, IT, 경영 교육을 중심으로 4학년 때 전원이 창업하는 커리큘럼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직 2학년생밖에 없지만 벌써 스타트업이 5개나 생겨나는 등 학생들도 의욕을 보이고 있다. 나카무라 이치야(中村伊知哉) iU학장은 “졸업생 전원이 창업을 해 취업률 0%、창업률 100%를 이루는 게 학교의 목표”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도 최근 스타트업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다. 일본 내각부와 문부과학성, 경제산업성은 지난해 7월 사업비 1200억엔(약 1조2300억원) 규모의 ‘스타트업 생태계 형성을 위한 지원 패키지’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코로나19로 스타트업이 위축되지 않도록, 정부가 직접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육성해 서로 연계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이처럼 일본 사회가 학생들의 창업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배경에는 “세계를 선도하는 일본 기업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는 위기감이 깔려있다. 도쿄 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된 500개 기업(TOPIX 500) 가운데 119개사가 1945~1954년에 설립됐다. 소니(1947년), 혼다(1948년), 닛신식품(1948년)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2005년 이후 설립된 기업은 38개사뿐이다. 미국 500대 기업(S&P500) 가운데 228개사가 1995~2015년에 세워진 것과 대조적이다.

성장 잠재력 측면에서도 뒤처져 있다. 시가 총액 10억 달러 이상의 비상장기업을 가리키는 ‘유니콘 기업’을 국적별로 보면 미국 274개사, 중국 123개사인 반면 일본은 단 4개사뿐이다. 기업 규모도 차이가 난다. 미국 기업은 IPO(기업 공개) 당 조달금액이 3억7200만 달러로 매년 금액이 커지고 있는 반면, 일본 기업은 4300만 달러로 이마저도 매년 감소하는 추세다.

지난 17일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코스피 상장을 앞둔 게임회사 크래프톤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세계 시장을 겨냥한 한국 기업들의 대형 상장이 이뤄지고 있다”고 전하며 위기감을 드러냈다. 닛케이는 방탄소년단(BTS)을 배출한 HYBE, 지난 3월 뉴욕 증시에 상장한 쿠팡을 언급하며 “한국은 유니콘 기업이 10개로 일본보다 많다. 일본 기업의 대형 상장이 적은 것은 세계 시장을 목표로 한 스타트업 육성이 뒤처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도쿄특파원 snow0@joongang.co.kr

"한국처럼 세계서 승부하는 스타트업 나와야"

나카무라 이치야 iU 학장 [본인 제공]

나카무라 이치야 iU 학장 [본인 제공]

창업전문 대학인 iU대학의 나카무라 이치야 학장은 2년 전 게이오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iU를 설립했다.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창업에 나선 것이다. 그는 “일본은 지난 30년간 퇴행했다”면서 “‘코로나 패전’으로 겨우 위기를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꼬집었다.

학생들에게 창업을 하라고 하는 이유는.
세계경영개발연구소(IMD)에 따르면 2020년 일본의 세계경쟁력은 34위였다(한국은 23위). 고도성장기였던 1989년엔 1위였는데 30년간 매년 한 단계씩 떨어진 셈이다. 한국처럼 세계에서 승부하고 해외에서 도전하는 분위기가 일본은 옅다. 그걸 높이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창업이다.
일본은 우수한 관료가 나라를 이끌어왔다.
지금은 정부 혼자 나라를 이끌어가는 시대가 아니다. 관료, 대기업도 중요하지만 창업가도 사회의 주류가 되어야 한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처럼 큰 혁신을 할 인재도 필요하고, 동네 상점가를 먹여 살릴 작은 혁신을 할 인재도 필요하다.
소니, 도요타 등 세계적 기업이 왜 나오지 않나.
교육, 의료, 행정 분야의 혁신이 뒤처졌다. 기업 경영층도 디지털화가 굉장히 늦었다. 고도성장기 성공 체험에 취해서 지난 30년간 아무것도 안 했다. 소니, 도요타 등도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급성장한 회사다. 코로나19로 인해 일본 사회가 드디어 위기를 느끼게 됐다. ‘코로나 패전’을 겪은 지금을 기회로 만들고 싶다.
한국 사례가 자주 언급된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이 열심히 해주는 게 일본에도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일본은 미국에 지면 그럴 수 있다지만, 한국에 지면 정신을 바짝 차린다.(웃음)

도쿄=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