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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중동이 원산지…자경전 담장에 석류를 새긴 뜻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45)

형상 문양은 말 그대로 동식물이나 곤충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이 우리가 지어낸 상상이거나 실체이거나 간에 어떤 형태적인 특성으로 그려지는 경우다. 그리고 이들 형태는 용도에 따라 단순화하거나 과장되거나 의도적인 변형을 통해 나타난다. 즉 인간이 물체의 형태를 필요에 따라 디자인한 형태로 표현하고 그 개체가 지닌 특성을 의인화하거나 차용한다는 말이다.

자경전 꽃담. [사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

자경전 꽃담. [사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

교태전을 나와 동쪽으로 보이는 자경전은 대비의 처소인데, 신정왕후가 사용하던 공간이다. 자경전의 서쪽 바깥 담장에서 꽃담 장식을 볼 수 있는데, 그 문양이 대단히 아름답고 운치 있다. 그 안쪽 담도 원래는 전체가 꽃담 장식을 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원래 자경전 서쪽은 자미당과 맞닿아 있었으나 지금은 헐리고 터만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경전에 딸린 꽃담으로 알고 있는 담장의 문양은 원래는 자미당의 주인을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또한 이곳에서 뒤돌아 바라보는 교태전의 외벽 꽃담도 상당히 아름답다. 자경전 서쪽 바깥 담장의 문양을 북쪽에서부터 살펴보면 매화, 복숭아, 모란, 석류, 국화, 영산홍, 대나무, 빙렬문이다. 이제 그 문양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알아보자.

매화(梅)

자경전 서벽의 매화. [사진 이향우]

자경전 서벽의 매화. [사진 이향우]

자경전의 서쪽 담장에는 꽃담 치장을 했다. 근래에 복원한 교태전의 꽃담은 멀찌감치 떨어져 보면 모를까 자경전 꽃담만큼의 섬세한 운치는 없다. 자경전 서편 담장의 꽃담은 1800년대 후반에 제작한 것으로 다른 궁궐에서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꽃담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회화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은 꽃담 제작에 부조의 바탕이 되는 밑그림은 궁중 도화서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른 봄 매화가지에 앉아 달빛에 졸고 있는 작은 새가 가져온 봄빛은 집 주인이 소망했던 만년의 화창한 봄날이다. 매화는 추운 겨울을 이기고 이른 봄 꽃피어 청아한 향기로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조춘화(早春花)라고 불렸다. 보름달을 배경으로 어린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앉아 쉬고 있는 월매도(月梅圖)는 담장 안에 살고 있는 여성을 항아(姮娥)로 묘사한 은유를 읽을 수 있다. 어린 휘파람새가 잠시 달빛에 기대어 쉬고 있다. 매화가지에 앉은 휘파람새는 해마다 봄을 노래하고 그 옆에서 봄을 꽃피우는 자미당 터 살구꽃의 유혹을 경복궁을 찾은 관람객이 어찌 모른 척할 수 있을까.

복숭아(仙桃)

자경전 서벽의 복숭아. [사진 이향우]

자경전 서벽의 복숭아. [사진 이향우]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고대 중국 서쪽 멀리 곤륜산에 사는 신선 서왕모(西王母)가 불사약을 가지고 있는데, 선도(仙桃)는 불사약으로 하나를 먹으면 몇 천 년을 산다고 했다. 그리고 옛 그림에 목숨을 관장하는 장수의 신, 수성(壽星)노인은 복숭아를 들고 등장한다. 복숭아는 무병장수를 의미하기도 하고 복숭아 나뭇가지는 귀신을 쫓는 데 효과적이라는 주술적 의미도 있다.

모란(牡丹)

자경전 서벽의 모란. [사진 이향우]

자경전 서벽의 모란. [사진 이향우]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는 꽃으로 예부터 꽃 중의 왕(百花王)이라 칭해졌다. 조선후기 화가 남계우는 그의 화접도(花蝶圖)의 화제에서 모란은 저절로 부귀영화의 기상이 있어 당시 제일이라 했다. 자경전 담장의 석모란(石牡丹)에는 나비가 날아와 꽃향기에 취해있다.

석류, 포도
열매가 익은 후 주머니 속에 많은 씨를 가지고 있는 석류는 붉은 주머니 안에 빛나는 씨앗이 가득 들어 있는 모양이 다남자(多男子)를 의미하고 주렁주렁 달린 포도송이도 다산을 상징해 여성의 공간에 많이 나타나는 문양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석류나 포도의 원산지로 불리는 중동에서도 우리와 같은 상징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페르시아 문화권에서 신부가 결혼할 때 지참하는 혼수 물목에 포도나 석류를 수놓은 물건이 많다. 그들의 건축물을 치장하는 타일이나 식기류에도 역시 포도문양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포도가 다산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국화(菊)
국화는 늦가을 첫 추위를 이겨내고 피는 꽃으로 다른 꽃이 만발하는 계절을 참으며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인내와 지조를 꽃피운다. 중국 진의 도연명이 사랑했던 정절과 은일의 꽃이다.

대나무(竹)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그대로 유지하는 절개로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윤선도는 오우가에서 사철 푸르며 욕심 없이 속이 비어있는 대를 칭송하고 있다.

자경전 합각의 태평화
태평화(太平花)는 천상에 핀다는 상상의 꽃으로 천하가 태평해 만사가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도안이다. 궁궐 단청에 두루 쓰이는 태평화 문양은 도리나 추녀, 평방 등 큰 부재의 마구리에 주로 그린다. 태평화는 꽃심에서 꽃잎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 연꽃의 형태로 단청에서는 검은 바탕에 꽃문양을 흰색으로 표현한다. 자경전 합각의 태평화는 꽃담 방식으로 중앙의 태평화를 팔각 회문이 두르고 있다. 같은 형식의 태평화가 창덕궁 연경당 선향재 양 측면에 있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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