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결핍의 삶이 그려낸 다랑논이 관광지…남해 재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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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95)

머리 위에 해가 지글지글한 날, 남해 한려수도의 대표적인 세 지역을 찾아간다. 한국여행작가협회 임인학 회장과 동행한다. 여행 전문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늘 각별하다. 여행의 참맛을 깨닫게 해주는 고마운 선배다.

첫 도착지는 남해군. 남해관광문화재단에 들러 인사 나누고 섬 곳곳 탐방과 취재에 들어갔다. 우선 여행 내내 마실 술을 사기 위해 지역 대표 막걸리를 만드는 서상양조장부터 들렀다. 그런데 주인 할머니는 들어가자마자 500년 된 뒤뜰 느티나무의 기를 받아보라고 하더니 이내 기 받은 값을 청구한다. 같이 일 좀 하자며 내겐 마당에 사다 놓은 장미를 심어달라 하고 선배한테는 배달할 막걸리 병뚜껑을 같이 닫자고 해서 얼떨결에 20~30분 정도 사역을 했다. 땀과 함께 여행의 서막이 올라갔다.

좁은 바다 물목에 V자로 대나무 발을 세워 멸치를 가두어 잡는 죽방렴과 미조항 멸치 작업장. 둘 다 몇 년 전 사진이다. [사진 박헌정]

좁은 바다 물목에 V자로 대나무 발을 세워 멸치를 가두어 잡는 죽방렴과 미조항 멸치 작업장. 둘 다 몇 년 전 사진이다. [사진 박헌정]

남해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어 다채로운 풍광을 이루는 섬이다. 조망이 아름다운 금산과 보리암, 이국적 정취의 독일마을, 싱싱한 멸치회를 맛볼 수 있는 미조항, 깨끗한 백사장의 상주 은모래 해변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래 남해도의 삶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황량함과 억척스러움 그 자체였다. 수채화처럼 구불구불 예쁜 가천마을 다랑이논은 손바닥만 한 뙈기 땅조차 포기할 수 없는 결핍의 삶이 비탈에 그려낸 주름살이었고, 화학비료가 없던 시절에는 척박한 땅에 쓸 거름조차 부족해 여수에서 똥까지 배로 실어날랐기에 ‘남해 똥배’란 말이 생겨났다.

한결 여유로워진 시대, 생산의 압박에서 벗어난 시대에 남해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따뜻한 기후, 사면의 바다, 풍성한 해산물, 안온한 섬 지형…. 안락하면서도 낯선 체험을 선호하는 세대의 기호에 딱 맞는다.

가천마을 다랑이논. 높은 비탈조차 놀릴 수 없어 층층이 좁고 긴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좌). 1973년 만들어진 남해대교. 남해대교와 노량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한때 남해 여행의 상징이던 남해각이 자리잡고 있다(우).

가천마을 다랑이논. 높은 비탈조차 놀릴 수 없어 층층이 좁고 긴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좌). 1973년 만들어진 남해대교. 남해대교와 노량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한때 남해 여행의 상징이던 남해각이 자리잡고 있다(우).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 캠프가 몰려들고 도시인의 장기 체류도 늘어나고 있다. 실제 남해군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최대 한 달간 숙박비를 지원하는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3회에 걸쳐 운영하고 있다. 시간 여유를 두고 창선도까지 포함해 H자 형상인 남해군 곳곳을 연결한 바래길 231km를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여행작가와의 동행답게 용문사, 바래길 사무소, 물미 해안전망대, 설리 스카이워크, 양떼목장(양모리 학교) 등을 스케치하듯 취재하며 둘러본 후 첫날 숙소인 금산 자락의 남해편백자연휴양림에 들었다.

남해각의 숙박부. 1990년대까지 숙박업소에 묵으려면 이 숙박부를 작성해야 했고 가끔 경찰관들이 ‘임검(臨檢)’도 나왔다.

남해각의 숙박부. 1990년대까지 숙박업소에 묵으려면 이 숙박부를 작성해야 했고 가끔 경찰관들이 ‘임검(臨檢)’도 나왔다.

휴양림의 장점은 내 집 같은 편리함 속에서 캠핑 분위기 내며 자연의 향기를 즐길 수 있다는 것. 저녁 메뉴는 돼지고기 바비큐다. 그런데 나무 테이블 위에 바비큐 그릴을 올려놓았다가 바닥을 태워 먹었다. 밑에 돌 같은 걸 까는 것을 깜빡했다. 숲속 반딧불이를 구경하며 낮에 사 온 막걸리를 즐겼다. 한낮의 열기를 잊게 하는 숲의 서늘함 때문일까, 편백의 피톤치드가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느낌이다.

이튿날, 관리인에게 말하고 테이블 보수비용을 낸 후 여행자들 사이에 소문난 식당에 찾아가 담백한 황태해장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 집은 오후 세 시면 문을 닫는다. 경쟁이 싫어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와 딱 좋을 만큼만 일한다는 사장님은 스마트폰에서 사계절 변하는 정면 호구산의 전경을 보여주며 자랑한다. 행복한 귀촌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커피는 돌창고 프로젝트에서 마셨다. 돌로 지어 사용하던 농업용 창고를 전시장으로 개조하고 옆에 카페를 만들어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데, 고령화한 농어촌에서 젊음의 힘과 감각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미륵산 정상에서 본 통영 다도해와 강구안의 전경은 통영 시내에서만 보던 것보다 훨씬 큰 감동을 자아낸다.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수월하게 올라올 수도 있다.

미륵산 정상에서 본 통영 다도해와 강구안의 전경은 통영 시내에서만 보던 것보다 훨씬 큰 감동을 자아낸다.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수월하게 올라올 수도 있다.

섬에서 나오는 길에 노량 앞바다와 남해대교가 한눈에 들어오는 남해각에 들렀다. 1973년 국내 최초 현수교인 남해대교 개통과 함께 남해의 대표적인 숙박 시설이자 남해도 관광의 아이콘 같은 장소였지만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을 앞두고 내부 작업 중이라 현재는 일부 전시관만 운영한다.

통영에서 맞이하는 셋째 날 아침, 오늘은 미륵섬의 달아길을 걸어보려 한다. 통영에서는 싱싱한 회를 맛보고 예쁜 바다를 감상하며 여유롭게 커피 마시는 게 보편적인 일정인데, 취재 의욕 넘치는 여행작가를 따라다니자니 몸은 좀 힘들다.

달아길의 첫 관문은 미륵산 등산.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미래사에 차를 세운 후 걸어 올라갔다. 해발 461m인데 섬의 산은 숫자로 표시되는 높이에 비해 훨씬 힘들다. ‘백두대간 왕복 종주’의 경력과 자존심으로 웬만한 고개는 쉬지 않고 오르는데, 계곡 없이 곧바로 정상으로 이어지니 가쁜 숨 끝에 결국 한 번은 쉬어야 했다.

그리고 맞이한 정상이다. 한려수도와 통영 강구안, 그리고 신시가지까지 펼쳐지는 조망! 해무인지 미세먼지인지, 뿌연 게 좀 아쉽다.

내려오는 길에 트래킹화 밑바닥이 떨어졌다. 등산하다 보면 도중에 등산화 밑창 떨어지는 일이 타이어 펑크만큼이나 잦다. 큰 산을 종주할 때는 눈앞이 깜깜해진다. 그래도 남은 부분이 고무신보다는 두터워 ‘스님들은 고무신 신고도 산길 잘 다니니…’ 생각하며 겨우 내려왔다. 발바닥이 충분히 지압 된 것까지는 좋은데, 좌우 높이가 1㎝쯤 차이 나서 허리가 아프다.

일상의 사소한 부분조차 이렇게 균형적이며 조화로우며, 반대로 그 평화와 익숙함에 균열이 생기면 이렇게 큰 충격이 있음을 느껴본다. 역시 변수는 불편하다. 변수가 세상의 발전을 이끌지도 모르지만, 역사의 표면보다는 그 안쪽 어딘가에서 먼지 크기로 박혀 사는 개개인은 상수에 익숙하다. 지진도, 군사쿠데타도, 코로나도 없어야 한다.

미륵산을 내려오다가 10년 넘게 신은 등산화 밑창이 떨어졌다. 가끔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와 그에 따른 고난은 에피소드는 여행의 맛을 더해준다.

미륵산을 내려오다가 10년 넘게 신은 등산화 밑창이 떨어졌다. 가끔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와 그에 따른 고난은 에피소드는 여행의 맛을 더해준다.

계획한 길은 아직 절반 이상 남았다. 마을이 나타났길래 일하는 아저씨한테 산양 읍내에 신발가게가 있는지 물으니 전혀 없단다. 내 키를 보더니 “맞는 신이 있으면 하나 주겠지만…” 한다. 얻어 신은 것만큼 고맙다.

택시를 불러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차에 있던 신으로 갈아신고 차를 몰고 다시 내려왔더니 길을 걸으려던 기분이 다 식었다. 대신 근처 박경리기념관에 들렀다. 기념관을 아주 잘 꾸며 놓았다. 넓고 조용한 공간이다. 박경리 선생과 그의 ‘토지’를 읽으며 성장을 이룬 사람으로서 고맙게 느껴졌다. 문인이 대접받는 세계에 대한 꿈이 잠깐 스친다. 묘역에 올라가는 길, 긴 유혈목이 뱀이 잔디밭에서 몸을 말리다가 깜짝 놀라 내 발밑을 스쳐 도망가고 나도 도망간다.

여유롭고 행복한 계절, 해가 구름 뒤로 숨어주어 고맙다. 이제 거제도로 넘어간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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