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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집에서도 몰카 걱정” 도 넘은 디지털 성범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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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1호 30면

여성 행세를 하며 영상 통화로 촬영한 남성 1300여명의 알몸 촬영물을 인터넷에 유포한 혐의를 받는 김영준이 지난 11일 오전 검찰로 가기 위해 종로경찰서에서 나오고 있다. 경찰은 지난 9일 김씨의 신상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여성 행세를 하며 영상 통화로 촬영한 남성 1300여명의 알몸 촬영물을 인터넷에 유포한 혐의를 받는 김영준이 지난 11일 오전 검찰로 가기 위해 종로경찰서에서 나오고 있다. 경찰은 지난 9일 김씨의 신상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며칠 전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파헤친 90쪽짜리 보고서를 냈다.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는 제목의 보고서에는 피해자들이 밝힌 충격적인 실태가 담겼다. 일례로 유부남 직장 상사가 선물한 탁상시계를 침실에 뒀는데 알고 보니 몰래카메라였다. 상사가 한 달 반 동안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본 것을 알게 된 피해 여성은 1년이 지난 후에도 우울증약을 먹고 있다. 사귀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자신의 얼굴을 합성한 나체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면서 주소와 직장, 연락처까지 공개해 정상 생활이 불가능해진 경우도 있다. 낯선 남자들의 이상한 문자를 받기도 한 이 여성은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옮겼다. 이 단체는 “두려움을 느낀 일부 한국 여성은 공중화장실 이용을 피하고 집에서조차 몰카 걱정을 한다”고 공개했다. 성범죄가 이 정도로 진화하고 있으니, 디지털 강국이라는 명성이 부끄러울 뿐이다.

국제인권단체 보고서 충격적, 젠더 폭력 심각 #솜방망이 처벌에 피해자들 고통만 더욱 커져 #불법 촬영물 ‘긴급삭제명령’ 등 제도 정비를

국내 성범죄 중 불법 촬영 관련은 2008년 4%가량에서 2017년 20%로 급증했다. 하지만 피해 여성들은 법적 대응을 할 때 큰 벽에 직면한다고 토로했다. 수사 담당자들이 신고 접수를 거부하거나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한다는 증언이 나왔다. 성관계 사진을 올린 남성을 고소하려 했더니 수사관이 “가해자의 변호사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이라며 사건 취하를 종용했다는데,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처벌도 솜방망이여서, 2019년 검찰이 디지털 성범죄를 불기소한 비율이 43.5%에 달했다. 지난해 불법 촬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가해자의 79%는 집행유예나 벌금형 수준이다. “가해자는 멀쩡하게 직장에 다니고 피해자만 어둠 속으로 숨어야 한다”는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피해 영상이나 사진을 온라인에서 지우기 어려운 점도 심각한 문제로 꼽혔다. 순식간에 퍼지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추가 피해를 막으려 촬영물을 빨리 없애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지원 기관의 인력과 예산이 부족해 피해자가 수백만 원을 들여 민간업체에 의뢰하는 일이 늘고 있다. 민사소송으로 가해자에게 촬영물을 삭제토록 하거나 손해 배상을 청구하려 해도, 형사소송이 끝날 때쯤이면 트라우마에 시달린 피해자가 지쳐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이 단체는 피해자가 법원에 신고하면 12시간 내 삭제토록 강제하는 ‘긴급 삭제 명령’ 제도를 도입하라고 권고했는데, 정부가 서둘러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서울시 제공]

[서울시 제공]

한국 정부와 국회가 관련 법률을 개정하긴 했지만 뿌리 깊은 성차별 문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보고서는 평가했다. 실제로 올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성별 격차 지수’에서 한국은 156개국 중 102위에 그쳤다. 한국만을 콕 집어 보고서를 낸 휴먼라이츠워치는 정부가 위원회를 만들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형량과 구제 수단의 적절성을 조사한 뒤 국가 차원의 실행 계획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가해자 등에게 정보가 공개되지 않도록 성범죄 관련 민사소송 때 피해자가 실명과 주소 등을 적지 않도록 제도를 바꾸라는 제언도 했다. 분야별 대안을 제시한 만큼 여성가족부 등 정부 부처가 즉각 검토에 나서야 한다. 더는 미룰 수 없다.

지난 7년간 남성 1300여 명의 나체영상을 녹화·유포한 이른바 ‘제2 n번방’ 피의자가 최근 검거되는 등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는 남녀 구분 없이 발생하고 있다. 미성년자가 여자 화장실에서 불법 촬영을 하다 적발되는 사건도 빈발하는데, 청소년들이 범죄가 아니라 일종의 놀이로 인식한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이런 상황 때문에 보고서는 국내 모든 학교와 직장에서 성에 대한 인식 및 디지털 권리에 대한 심도 있는 교육을 하라고 강조했다. 이를 수용해 교육부가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없애고 젠더 폭력이나 디지털 성범죄를 막기 위한 융합 성교육 프로그램을 새로 개발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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