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굴욕후 김정은의 돌변···북한서 레드벨벳 사라졌다

중앙일보

입력 2021.06.17 05:00

지면보기

종합 10면

아이돌 레드벨벳이 2018년 4월 3일 평양에서 두 번째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아이돌 레드벨벳이 2018년 4월 3일 평양에서 두 번째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시대를 맞아 한때 평양까지 진출했던 K-POP이 이젠 북한 사회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바뀌었다.

2년 전 레드벨벳 공연에 흐뭇했던 김정은
이젠 "반사회주의 투쟁하라" 강력 지시
하노이 회담 결렬 뒤 내부 결속 회귀
반동사상배격법 만들어 K-POP 단속

김 위원장은 15일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8기 3차)에서 “반(反)사회주의, 비(非)사회주의와의 투쟁을 더욱 공세적으로 실속있게 전개해 나가는 데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원칙적 문제들을 천명했다”고 노동신문이 16일 전했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반사회주의와 비사회주의와의 투쟁과 관련, “우리식 사회주의의 전도와 인민들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도 했다. 노동신문은 반사회주의 및 비사회주의의의 현상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명운을 걸겠다는 취지의 입장을 내놓고 있다는 점에서 북미 대화 국면에서 느슨해졌던 사회적 통제를 다시 조여 ‘자본주의 날라리풍’을 척결하려는 의도라는 게 대북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당초 ‘젊은 지도자’로 등극했던 김 위원장은 2012년 집권 직후 은하수 관현악단, 모란봉 악단 등을 창단하며 ‘서구 스타일’ 확산을 개의치 않았다. 부인 이설주 여사의 금성학원 동창이나 후배들을 대거 등장시킨 모란봉 악단 창단이 대표적 예다. 모란봉 악단 가수들이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공연에 나섰고, 전자 바이올린과 전자 첼로, 전자 드럼과 같은 서구식 음악을 활용했다. 모란봉악단이 북한판 ‘걸그룹’으로 불렸던 이유다.

 북한의 모란봉 악단이 2012년 7월 공연 도중 미키마우스를 등장시켰다 [중앙포토]

북한의 모란봉 악단이 2012년 7월 공연 도중 미키마우스를 등장시켰다 [중앙포토]

또 이 악단은 공연 중간에 미국의 만화영화 주인공인 미키마우스와 백설공주 인형을 등장시키고, 영화 ‘록키’의 주제곡과 팝송 ‘마이웨이’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전파를 타고 북한 전역으로 퍼졌다. 김 위원장 역시 이 공연을 보고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은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익명을 원한 고위 탈북자는 “과거 북한의 악단 공연은 긴 드레스나 한복을 입고 공연하는 게 일반적이었다”며 “김정은 시대 들어 기존에 자본주의 문화로 터부시했던 것을 풀어 젊은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미국 프로농구의 이단아로 평가받는 데니스 로드먼을 두 차례나 초청해 친선 농구대회를 열고, 주민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4년 평양체육관에서 미국프로농구(NBA) 출신 데니스 로드먼 일행과 북한 횃불팀의 농구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노동신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4년 평양체육관에서 미국프로농구(NBA) 출신 데니스 로드먼 일행과 북한 횃불팀의 농구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노동신문]

김 위원장의 파격 행보는 ‘한반도의 봄’을 맞은 2018년 정점에 오른다. 그는 그해 4월 남북 정상회담에 앞서 남측 연예인들이 평양을 방문해 진행한 ‘봄은 온다’ 공연장을 부인과 함께 찾아 관람했다. 당시 원조 아이돌 소녀시대의 서현이 사회를 보고, 이선희를 비롯 아이돌인 레드벨벳이 무대에 올라 ‘빨간맛’을 공연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1일 평양의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측 예술단 공연을 관람한 뒤 '레드벨벳'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1일 평양의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측 예술단 공연을 관람한 뒤 '레드벨벳'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박수를 치며 공연을 관람한 김 위원장은 “문화예술 공연을 자주해야 한다. 북남이 함께하는 합동공연이 의의가 있을 수 있으나, 남측 공연만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며 “내가 (공연팀) ‘레드벨벳’을 보러 올지 관심들이 많았는데, 원래 모레(4월 3일 남북합동공연에) 오려고 했는데 일정을 조정해서 오늘 왔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을 비롯해 평양 주민들이 남측의 최신 공연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확산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후 김 위원장의 태도는 확 달라졌다. 남측 아이돌 노래는 물론이고 김 위원장이 선물한 벤츠 버스를 타고 전국 순회 공연에 나서던 모란봉악단은 최근 북한 TV에서 자취를 감췄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이 전국적으로 한국 드라마와 가요, 뮤직 비디오, 서방 문화 등의 유포를 대대적으로 단속중이다. 과거 1990년대 후반 비사그루빠(비사회주의 그룹)라는 단속반이 VCR 테이프를 집중적으로 찾아 다녔다면 이번엔 주민들의 USB를 중점적으로 뒤진다는 게 차이다.

이같은 K-POP 척결은 공교롭게도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ㆍ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확산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12월엔 자본주의 문화와의 단절을 강조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제정해 처벌 규정까지 만들었다. 법 전문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남한의 자본주의 날라리풍 처벌이 주목적임은 분명하다.

전영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는 “북한 청년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자본주의 문화 접근 현상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며 “북한 지도부도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데, 대외적인 환경이 어려울 때 내부 결속을 다지는 차원에서 단속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이  남북, 북ㆍ미 관계에 따라 ‘남측 문화’를 쥐었다 폈다 한다는 얘기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