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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무상급식 떠오른다, 대선판 흔드는 '기본소득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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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 4월 28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21 대한민국 기본소득 박람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 4월 28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21 대한민국 기본소득 박람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뉴스1

차기 대선을 9개월 앞둔 정치권에 ‘소득 바람’이 불고 있다. 기본소득을 대표 정책으로 굳힌 이재명 경기지사가 여권 ‘1강’에 등극하면서 이낙연·정세균·박용진 등 경쟁 주자들이 당내 반(反)기본소득 전선을 구축한 게 시작이다. 여기에 유승민 전 의원이 ‘공정소득’을, 오세훈 서울시장이 ‘안심소득’을 각각 기본소득 대항마로 제시하면서 야권도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기본소득·공정소득·안심소득… #이재명·유승민·오세훈 논의 가열 #이낙연 신복지에 정세균 ‘마이마이’ #재원, 복지 구조조정은 뒤로 밀려 #무상급식 논쟁 10년만에 ‘복지’ 충돌 #유승민 “모두 똑같이 주면 반서민적” #여권 내서도 “현금성 복지로는 한계”

무슨 돈을 누구에게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줄 것이며 이것은 과연 옳을까. 기본소득은 변화하는 복지 패러다임 논의의 단초라는 의미를 갖는다. 안상훈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국 정치권의 기본소득 논쟁은 비단 소득뿐 아니라 변화하는 경제 구조와 성장 담론, 노동의 형태 등에 대한 총체적 복지 논의로 확장되는 게 맞다”고 말했다. 2012년 대선판에 ‘복지 국가론’을 등장시킨 2010~2011년 무상급식 논쟁처럼, 기본소득 논쟁이 내년 대선에서 10년만의 복지 담론 충돌을 가져올 것이란 전망이다.

‘한국형 (기본)소득’ 논쟁

엄밀한 의미의 기본소득은 보편성·무조건성·정기성·현금 지급·개인 지급 등이 전제다. 지급 수단으로 지역화폐(소비쿠폰)를 제시하는 부분 변형을 감행했지만, 이재명표 기본소득은 전 국민에게 주는 ‘보편적 소득 지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기 대선주자 공약 중 가장 원조 기본소득 개념에 가까운 모델이다.

기본소득 둘러싼 여야 대선후보 복지 논쟁.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기본소득 둘러싼 여야 대선후보 복지 논쟁.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 지사는 지난 9일 ‘기본소득 비판에 대한 반론’이란 장문의 페이스북 글에서 “야권에서 주장하는 안심소득은 차별적 현금복지 정책이 맞지만, 기본소득은 보편적 소득지원으로 복지적 성격을 넘어선 경제정책”이라고 밝혔다. 이 지사의 기본소득 구상은 4차 산업 혁명으로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되는 시대에 수요를 창출한다는 경제정책 측면에 방점이 찍혀 있다.

반면 최근 야권에서 나온 후발 소득 브랜드들은 “하후상박(下厚上薄)식”(오세훈표 안심소득)이라거나 “니트(Negative Income Tax·음의 소득세)”(유승민표 공정소득) 개념을 통해 차등 지급을 강조하고 있다. 10년 전 나왔던 ‘보편 대 선별’ 대립각이 주된 전선이다. 이 때문에 다수 전문가들은 현 정치권의 ‘OO소득’ 논의에 대해 “기본소득 원개념을 벗어나 ‘현금 복지 각론’에 초점을 맞춘 한국형 소득 논쟁”이라고 평가한다.

야권의 기본소득 비판은 ‘보편 지급이 과연 정의로운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유 전 의원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똑같이 주는 기본소득은 5000만 국민이 똑같이 가난하다고 생각할 때나 할 수 있는 반서민적 정책”이라고 말했다. 오 시장도 앞서 “이 지사의 가짜 기본소득, 무늬만 기본소득이야말로 안심소득에 비해 역차별적이고 불공정하다”고 이 지사를 공격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일률적인 분배는 공정이 아니다”라며 선별·차등적 현금 복지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회 불평등이 존재할 때 정부의 가용 복지 자원은 어려운 계층에게 우선 배분돼야 한다는 롤스의 ‘정의론’ 개념”을 거론하며 “한국형 기본소득인 ‘K-기본소득’ 도입 방안을 집중 검토해 나가고자 한다”고 중앙일보에 밝혔다.

현금성 복지 주장 살펴보니.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현금성 복지 주장 살펴보니.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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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성 복지로 ‘몰아주기’ 옳은가

여야 간 전선이 ‘보편 대 선별’ 대립 재현 양상이라면, 기본소득을 둘러싼 여권 내 논쟁은 ‘현금만 주는 게 과연 능사인가’라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야권이 ‘중층적 복지를 현금 복지로 단순화해 복지전달비용을 줄이자’는 작은정부론에 근거해 기본소득 논쟁에 뛰어들었다면 여권의 공감대는 복지 확대를 위한 큰 정부론에 뿌리를 내린 형국이다.

정권 재창출을 외치는 민주당 대선 주자들의 복지 공약은 저마다 문재인 정부의 ‘포용 국가’ 기조를 유지·계승·발전하는 포괄적 복지를 추구한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지난 11일 이재명표 기본소득에 “돈은 많이 드는 데 정작 지원이 필요한 약자들에게는 필요한 것보다 덜 지원되는 맹점이 있다”며 “오히려 사회복지체계를 충실히 해서 기본소득 이상의 효과를 얻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소득·주거·노동·교육·의료·돌봄·문화·환경 8개 분야를 아우르겠다는 ‘신복지’를 주창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민주당의 당론이 될 수 없다”며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맹공을 편 정세균 국무총리 역시 현행 복지 시스템의 총체적 확대·개편을 주장한다. 그가 제시한 ‘마이마이 복지’는 “천편일률적 복지 대신 국민 개개인이 복지를 선별·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표방, 복지 전반의 접근성을 확 높이자는 구상이다.

현금성 복지 비판 입장은(1).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현금성 복지 비판 입장은(1).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민주당 최연소 대선 주자인 박용진 의원도 “세금 거둬 나눠주는 프레임을 벗어나야 한다. 현금성 복지로는 자산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기본소득 비판에 가세했다. 출마 선언에서“안심과 다행이라는 복지국가의 최소 안전망에 머물지 말자”고 강조한 박 의원은 소득 불평등 해소 대안으로 국민에 수익을 공유하는 국부펀드 모델을 제시했다.

정치와 복지 사이…남은 고민

다만 여권 내 견고한 반(反) 기본소득 기류 속에서도 이 전 대표와 정 전 총리는 기본소득 아류인 ‘기본자산’ 개념을 차용하고 있다. 군 제대 시 3000만원을 지급하는 ‘사회출발자금’(이낙연), 사회 초년생에 1억원을 주는 ‘미래씨앗통장’(정세균)이 대표적이다. 익명을 원한 한 캠프 관계자는 “포퓰리즘이란 비판의 이면에 경선·본선 주목도를 확 끌어올릴 정치적 효용이 분명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한 켠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현금 복지가 아닌 기회 복지”(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주장이 거론되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야권에서는 원희룡 제주지사가 “기본소득은 노동 종말에 대한 공포를 앞세운 무책임한 선동”이라며 이른바 ‘국가 찬스’를 통한 교육·직업훈련 투자 증대를 주장한다. 이광재 민주당 의원은 일자리를 통한 실질 소득 증대, 복지 대전환 등을 내세우며 “전면적 기본소득은 시범실시로 끝날 운명”이라고 꼬집었다.

현금성 복지 비판 입장은(2).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현금성 복지 비판 입장은(2).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복지 담론의 끝에는 늘 재원 마련, 증세 논쟁이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브히지트 바네르지는 지난 4월 기본소득 박람회에서 “(미국 기준으로) 세금을 현재의 GDP(국내총생산) 26%에서 31.2% 정도로까지 올리는 것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내 대선 주자 중 누구도 ‘보편 복지=보편 증세’ 주장을 펴지 않는다. 이 지사가 밝힌 “기본소득 목적세(탄소세·데이터세 등) 도입” 구상도 장기 계획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존의 복지 지출을 축소하지 않는 기본소득은 증세가 불가피하다”면서 “이 때문에 정책적 의미로 기본소득이 제기될 때는 기존 복지 축소 또는 대체가 함께 논의된다”고 설명했다. 이 지사는 기존 복지 폐지 여부·범위에 대한 명확한 입장 정리를 미루고 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민주당의 전통적 선거 어젠다인 남북·평화 이슈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년 대선에서는 복지 이슈가 여권 최대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라면서 “언더독(약세 후보)이 아닌 1위 주자라는 점에서 이재명의 기본소득 약점을 향한 나머지 주자들의 공격은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분석했다.

심새롬·손국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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