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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반평생 홀린 벼루, 이게 바로 신의 작품" 이근배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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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화초석 연화문일월연, 조선 15~16세기, 12x20.3x1.8cm.[사진 가나문화재단]

위원화초석 연화문일월연, 조선 15~16세기, 12x20.3x1.8cm.[사진 가나문화재단]

"남들이 이중섭 그림 한 점을 30만원 주고 살 때 저는 벼루 하나에 100만원을 줬어요. 지난 50년간 제가 벼루 대신 그림을 사 모았더라면 아마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죠?(웃음) 그래도 저는 제 벼루를 혜원, 단원, 이중섭 그림하고 바꿀 마음이 없습니다."

가나문화재단, 16일 개막 #소장 옛벼루 100여 점 공개

올해로 등단 60주년을 맞는 이근배(81) 시인의 옛 벼루 소장품 전시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6일 개막한다. 가나문화재단(이사장 김형국)이 기획해 여는 전시로, 이 시인이 1973년부터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모아온 1000여 점의 벼루 중 한국의 옛 벼루 100여 점을 엄선해 공개한다. "아직까지 내가 모은 것보다 더 좋은 벼루는 못 봤다"고 말하는 이 시인은 "벼루야말로 '신의 작품'이다. 우리 자연과 역사와 문화의 정수가 이 안에 다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연벽묵치(硯癖墨痴)’라 소개했다. 속된 말로 '벼루 또라이' '벼루 바보'라는 뜻이란다. 어디선가 내 것보다 더 좋은 벼루를 본 날엔 잠 못 이루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돈을 썼다. 돈보다 더 바친 것은 마음이었다. 벼루에 관해 쓴 연작시만 80여 편에 이른다. 이번 전시 제목은 '해와 달이 부르는 벼루의 용비어천가', 벼루에서 해와 달을 만나고, 나무와 숲을 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맑은 계곡 물소리까지 듣는다는 시인의 경지를 가늠케 한다.

벼루, 디테일로 승부하다 

위원회초석 기국농경장생문연, 조선 15~16세기.20.2x30.2x2.4cm..[사진 가나문화재단]

위원회초석 기국농경장생문연, 조선 15~16세기.20.2x30.2x2.4cm..[사진 가나문화재단]

전시는 '명품 벼루'의 향연이다. 우선 크기가 압도적으로 큰 것이 많고, 벼루에 새겨진 조각 디테일이 탄성을 자아낸다. 벼루 자체가 돌로 만들어진 캔버스이자 조각품인 셈이다. 그 네모 화면 안에 대나무부터 꽃과 포도, 원숭이, 벌거벗은 아이들, 벌레 먹은 잎사귀까지 등장한다. '보석상자'를 방불케 하는 주칠 벼루 상자도 주목할 만하다.

이 시인은 "여기 전시된 벼루는 조선 초기 왕가에서 쓰거나, 개국 공신들에게 하사하거나 외국 사신들에게 선물했던 것들"이라며 "그런데 이 화려한 벼루들이 임진왜란 이후 대가 끊기듯이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의 두 축은 녹두색과 팥색이 어우러진 위원석에 생동감 넘치는 문양이 두드러지는 위원석 벼루와 다산 정약용이 으뜸으로 꼽았다는 보령의 남포석 벼루다. 위원석 벼루는 조선 전기에 평안북도(오늘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자강도) 위원군의 위원강 강돌에서, '남포석 벼루'는 19세기 이래 충남 남포군 남포면(오늘의 보령시 남포면) 성주산에서 주로 채취한 벼룻돌로 만든 것이다.

이번에 전시작 중 그가 가장 귀한 벼루 중 하나로 꼽는 것은 ‘정조대왕사은연(正祖大王謝恩硯)’. 정조가 자신의 스승이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스승이기도 했던 대제학 남유용에게 하사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1973년 창덕궁 명연전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뽑혔다.

가로 26㎝, 세로 41㎝의 큰 화면에 매화와 대나무 문양을 빽빽하게 채운 ‘위원화초석 매죽문일월대연’, 가로 21㎝, 세로 40㎝의 검고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남포석 장생문대연’도 눈길을 끈다.

선비의 글농사는 벼루 위에서 

정조대왕사은연, 중국 단계연, 20.2x27.7x3.5cm. [사진 가나문화재단]

정조대왕사은연, 중국 단계연, 20.2x27.7x3.5cm. [사진 가나문화재단]

위원화초석 고사인물문장방연 조선 15-16세기.[사진 이은주]

위원화초석 고사인물문장방연 조선 15-16세기.[사진 이은주]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그는 "할아버지의 남포석 벼루를 보며 자랐다." "1973년 창덕궁에서 열린 벼루전시회를 보고 벼루에 홀렸다. 마음에 쏙 드는 벼루가 나오면 하나 가졌으면 했는데 그게 100만원이나 하는 것 아닌가. 친구 돈까지 빌려 샀다. 그게 수집의 시작이었다." 집 한 채에 230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옛 선비들은 벼루를 연전(硯田)이라 했다. 농부가 밭을 갈듯이 선비는 벼루로 글농사를 짓는다"면서 "종이나 붓, 먹은 소모품이지만 잘 만든 벼루는 차마 먹을 갈아쓰지 못하고 그 자체가 완상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중·일 벼루 중에서도 자유롭고 생동감 있는 문양,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진 우리나라 옛 벼루가 으뜸"이라며 "한국의 벼루는 청자, 백자 못지않은 우리의 자랑거리"라고 강조했다.

1973년부터 50년 가까이 수집해온 옛벼루 전시를 여는 이근배 시인. [사진 이은주]

1973년부터 50년 가까이 수집해온 옛벼루 전시를 여는 이근배 시인. [사진 이은주]

그는 벼루를 '그냥 벼루'로 여기는 우리 문화에 대한 아쉬움도 표했다. "1973년 일본의 벼루 연구가 요시다 긴슈(吉田金壽)는 한국 벼루에 대한 기록을 담아 50권 한정 핸드메이드 책자로 만들었고, 벼루에 동양문화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썼다"며 "한국 벼루에 대한 인식을 우리부터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가나문화재단 김형국 이사장은 "이번 벼루 전시는 한국 미학 재발견의 추가 장르로 기록될 만하다. 해와 달, 새와 나무, 뱃놀이, 밭갈이 등의 농경사회 풍경이 마치 세필화로 그린 듯 전개되는 위원석 벼루의 조형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시는 27일까지.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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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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