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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의 훈민정음, 이건희의 신라사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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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은 삼성가로부터 신라사경을 기증받지 않았습니다.” 지난 2일자 본지에 고 이건희(1942~ 2020) 삼성 회장에 대한 이호재 서울옥션 회장의 회고 기사가 실린 날, 민병찬 국박 관장이 본지에 전해온 문자였습니다. 이 서울옥션 회장은 인터뷰에서 “(이건희 회장은) 인왕제색도와 신라사경을 자랑스러워하셨다”며 “유족들이 인왕제색도와 신라사경을 내놓은 건 이건희 컬렉션의 상징 자체를 내줬다는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박물관 측이 기증받은 사실을 부인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기증품 내역조차 다 파악하지 못한 국박의 실수였습니다. 신라사경(新羅寫經)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화엄경의 필사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공식 명칭이 ‘신라사경’일 리가 없지요. ‘황지 묵서금광명경’이란 이름으로 기증된 고문서가 신라사경이 맞는데도, 관장이 성급하게 “없다”고 밝힌 것이었습니다. 불교미술 전문가인 관장도 막지 못한 해프닝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번에 국박은 삼성가로부터 9797건 2만1600여 점을 기증받았습니다. 이중 ‘신라사경’ ‘월인석보’처럼 고문서와 서적 등 전적류(典籍類)만 1만2000여 점에 달합니다. 인력이 한정된 박물관에서 ‘폭탄’처럼 쏟아진 기증품 전모를 하루아침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통일신라시대 불경 필사본인 ‘황지 묵서금광명경’일부. [사진 이호재]

통일신라시대 불경 필사본인 ‘황지 묵서금광명경’일부. [사진 이호재]

“사람들은 컬렉터 이건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지난 2~3일자 본지 인터뷰에서 ‘컬렉터 이건희’를 회고한 이호재 서울옥션 회장의 말이었습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은 무엇보다 수집품의 역사적 가치를 중시하는 수집가였습니다. 1970년대 말 이병철 회장이 신라사경을 입수한 데 이어 이건희 회장은 후에 존재가 알려진 나머지 부분을 사들였습니다. 이종선 전 호암미술관 부관장은 저서 『리 컬렉션』에서 “‘신라사경’의 출현은 고대를 여는 열쇠였다”고 썼고, “신라사경이야말로 국보 중의 국보”라고 말했습니다.

고려 불화는 종교미술을 뛰어넘어 예술성이 탁월하지만, 국내에선 오랫동안 잊혔었죠. 1979년 이병철 회장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서 ‘아미타삼존도’ 등 고려 불화 두 점을 한국으로 들여왔는데요, 이건희 회장도 “고려 불화를 되찾자”며 나서 천수관음보살도와 수월관음도 등을 해외에서 찾아왔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문화재를 지킨 간송 전형필(1906~62)은 1942년 기와집 열 채 값의 거금(만원)을 주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사들인 일화로 유명합니다. 또한 간송은 훈민정음을 자신의 수집품 중 최고 보물로 여겼죠. ‘돈이면 다 된다’고 쉽게 말하는 세상, 하지만 단순히 개인 취향이나 돈만으로 절대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미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과 경외심, 그리고 광기에 가까운 열(熱)과 성(誠)이 남긴 유산입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