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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계’ 드는 도쿄 친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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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영희상, 주문진에 가본 적 있어?”

얼마 전 만난 일본인 친구가 물었다. “10년도 더 된 것 같은데”라는 내게 자신은 이번 겨울을 목표로 친구들과 ‘주문진계’를 들었다고 했다. 방탄소년단(BTS)이 ‘봄날’의 앨범 사진과 뮤직비디오 촬영을 한 버스정류장이 강원도 강릉 주문진에 있단다. 서울 경복궁과 한국가구박물관, 용산에 있는 BTS 기획사 사옥까지…, 빨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맞아야 ‘BTS 투어’가 가능할 텐데, 일본의 백신 접종 속도가 느려 답답하다고 했다.

한국의 친구 중 한 명은 몇달 전 한 항공사가 예약 판매한 일본행 비행기 표를 사 두었다. 일본 관광이 가능해지는 시점부터 1년 이내에만 사용하면 되는 항공권이다. 코로나19로 양국 간 이동이 완전히 단절된 지 2년이 다 돼가는 상황, 연일 쏟아지는 ‘관계 악화’ 뉴스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서로를 방문할 날을 꿈꾸는 사람은 일본에도, 한국에도 분명 존재한다. 아니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방탄소년단 ‘봄날’ 앨범 재킷 촬영지인 주문진 향호해변 버스정류장. [사진 한국관광공사]

방탄소년단 ‘봄날’ 앨범 재킷 촬영지인 주문진 향호해변 버스정류장. [사진 한국관광공사]

2018년 말 강제 징용 판결 이후 악화한 관계와 전 세계적 감염병인 코로나19가 겹친 것은 한·일관계엔 진정한 재난처럼 보인다. 그동안은 정치적으로 다투는 상황에도, 한편에선 여전히 교류하고 방문하고 소통하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관광을 포함한 민간 교류마저 완전히 단절된 지금, 악화 일로인 관계를 변화시킬 계기를 찾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오해는 깊어지고 적대감은 커져만 간다.

정부 차원의 화해 무드는 점점 더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지난 주말 영국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도 한·일 정상은 회담을 갖지 않았다. 일본 내 혐한 분위기를 등에 업고 ‘납득할 해결책을 갖고 오지 않으면 너랑 말 안 해’라고 버티고 있는 일본 정부의 옹졸함이 커 보인다. 이대로라면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한 관계 개선도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 대립할 사안에선 대립하되 협력할 사안은 협력하면서 ‘윈윈’의 길을 찾아가는 ‘정상적 국가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재는 한·일 양국 모두 백신 접종률이 충분치 않은 상태지만, 몇달 후부터라도 왕래만은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빨리 논의를 시작하길 바란다. 당장의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주문진에 가 보고 싶은 마음’까지 가로막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만나서 보고 듣지 않고선 서로에 대한 이해는 쌓이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한·일 양국 정부가 관계 개선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이것밖에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영희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