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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까지 38선 긋고싶지 않다" 했지만…베른서 벌어진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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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스위스 베른서 동시에 열린 2개의 남북한 현대 미술전 #주제는 '국경을 넘어서' '산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북한 작품,수려한 산수화나 우상화등 장르에 제한 #한국 작가들은 재료·기법 자유롭고 주제 다양해 #"북한 작가들, 철저한 상위 질서와 역할 세분화"

2. 리승호와 작가그룹, The year of Shedding Bitter Tears, 2006

2. 리승호와 작가그룹, The year of Shedding Bitter Tears, 2006

필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인 스위스의 베른 시에서 남북한의 현대 미술을 함께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현대 미술관 중의 하나인 베른 현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국경을 넘어 (Border Crossing)’라는 전시다. 스위스 출신 컬렉터 울리 지그씨가 소장해온 남북한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베른은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어려서 유학 생활을 했고, 남한과 북한 대사관이 함께 소재하고 있는 도시다.

스위스가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는 중립국이라는 점이 이 전시 개최를 가능하게 했을까? 유럽에서도 인기를 끈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리정혁 동지와 남한의 사업가인 윤세리가 스위스에서는 자유롭게 만난 것처럼. 스위스 현지 언론 뿐 아니라 뉴욕 타임즈나 아트 넷 등의 해외 언론들도 이 전시를 주목하고 있다. 중국에서 오래 대사 생활을 하면서 중국 현대 컬렉터로 유명한 울리 지그씨는 평양 주재 스위스 대사 당시 북한의 현대 미술과 남한의 동시대 미술 작가들의 작품들을 수집,소장해왔다. 한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증거로서 미술품을 소장해 온 그에게 동시대 남북한 예술품을 함께 소장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한국 작가 14명,북한 화가는 만수대창작소 소속 

필자는 2010년 비엔나에서 열린 대규모 북한 현대 미술 전시를 관람하면서, 강력한 정치적인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북한 현대 미술의 현재를 목격했다. 그런데 이번 베른 전시처럼 남한과 북한의 현대 미술이 나란히 전시되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약 4000명의 화가들이 소속된 정부 산하 만수대창작소에서 제작된 것이 대부분인 북한의 작품들은 최고 지도자들을 우상화하는 작품들과 매우 수려한 기술로 그려진 산수화나 풍경화로 제한된 장르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이세현·이수경·함경아·전준호·정연두·신미경·김인배·허은경 등 14명의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은 재료·기법 등이 매우 자유롭고, 다양한 주제들로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한 담론들을 쏟아내고 있다.

베른 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이세현 작가의 ' Bwtween Red-33', 2007  [올리 지그 컬렉션]

베른 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이세현 작가의 ' Bwtween Red-33', 2007 [올리 지그 컬렉션]

"예술에서까지 38선 긋고싶지 않다"

이번 전시에서 남한과 북한의 그림은 따로 분리되어 전시되지 않고,하나의 테마에 맞추어 남북한의 그림이 나란히 걸렸다. “나는 예술에서까지 38선을 긋고 싶지 않았다.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나 편견을 버리고 현 시대를 반영하는 예술의 서로 다른 면을 관람객이 발견하기를 바랐다.” 베른 미술관 큐레이터 뷜러씨는 이 전시의 기획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함경아 작가의 작품 ' Chandlier,' 2012-2013 [사진 최선희]

함경아 작가의 작품 ' Chandlier,' 2012-2013 [사진 최선희]

하지만 이러한 기획 의도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전시를 감상하기에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분단된 두 나라에서 예술이 지니는 의미의 간극은 너무나 벌어져 있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예술가들에게 창작에 대한 본능은 우리 삶에 놓인 물리적·정신적 국경이나 이념의 경계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와, 한 시대를 거침 없이 비판하고, 부조리를 예술로 일깨우려 하는 용기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는 절대적으로 존중 받아야 한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놓인 물리적 국경보다 더 굳게 닫혀버린 예술의 장벽은 당분간은 쉽게 넘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북한의 예술가들도 자유롭게 자신들이 원하는 창작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예술이 분단국가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편 베른의 또 다른 미술관인 산악 미술관에서는 ‘산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산들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산악 미술관 관장인 베아트씨는 “이 전시를 통해 북한에 대한 정치적인 시각을 잠시 접어두고 순수하게 북한의 산들과, 자연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전시는 산악 미술관 관계자들과 스위스 영상 촬영 팀이 북한에 17일 동안 체류하면서 촬영한 영상과 인터뷰들을 모아 기획되었다. 백두산과 금강산을 비롯한 북한의 명산들과 이 산들을 찾으며 즐거워하는 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북한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산이 매우 중요한 의미와 즐거움을 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술이 분단 국가에 대해 무엇을 말하주나''라는 주제로 베른 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토크쇼, 왼쪽부터 베른 현대 미술관의 큐레이터 캐서린 뷜러,컬렉터 울리 지그 , 베른 현대 미술관장 니나 찜머, 산악뮤지엄 관장 베아트 해힐러.  [사진 최선희]

'예술이 분단 국가에 대해 무엇을 말하주나''라는 주제로 베른 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토크쇼, 왼쪽부터 베른 현대 미술관의 큐레이터 캐서린 뷜러,컬렉터 울리 지그 , 베른 현대 미술관장 니나 찜머, 산악뮤지엄 관장 베아트 해힐러. [사진 최선희]

이렇듯 스위스 베른에서는 북한과 남한을 조명하는 두 개의 전시가 큰 화제가 되고 있다. 마침 스위스 현지 시간 6월 8일 저녁에 이 두 전시를 화두로 한 토크쇼가 베른 현대 미술관에서 열려 참석하게 되었다. 베른 현대 미술관 관장인 니나 찜머, 이번 전시 큐레이터 캐서린 뷜러, 산악 미술관 관장인 베아트 헤힐러와 컬렉터 울리 지그씨가 패널로 나온 토크의 주제는 ‘예술이 이 분단 국가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였다.

천지 앞서 포즈 취하고 지도자 찬양하는 북한 주민들

토크쇼엔 미술관 세미나실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특히 북한에서의 예술 창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청중들의 호기심이 매우 컸는데, 울리 지그씨는 사업가와 외교관·컬렉터로서 겪은 경험을 청중들과 공유하였다.그는 “북한에서는 대규모 공장처럼 예술가들이 모여서 당에서 요청하는 특정한 주제에 부합하는 작품들을 생산해내고, 그 안에서 작가들 사이에 철저한 상위 질서가 존재하고 역할이 세분화되어 있다. 작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할 때는 당의 간부들이 동행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북한에서는 예술의 개념 자체가 다른 나라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작가들은 철저히 당에서 승인하는 주제의 작품들만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들에게 가해지는 이러한 통제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 두 전시가 모두 북한에 대한 정치적인 비판을 배제하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북한의 정치 상황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산악 미술관 전시에서는 산에서 만나는 북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 영상들을 볼 수 있다. 백두산 천지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이들은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면 반드시 북한의 최고 지도자를 찬양하는 멘트를 빼놓지 않았다. 베른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는 전시 오픈에 앞서 이 영상들을 모두 미리 보여달라고 했지만, 산악 미술관 관장인 헤일러씨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단지 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뿐" 이라고 하면서.

산악 뮤지엄 전시에서 보여준 북한 최고 화가중의 한 명인 최창호 작가 인터뷰. 그는 주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백두산의 전경을 그린다. [사진 최선희]

산악 뮤지엄 전시에서 보여준 북한 최고 화가중의 한 명인 최창호 작가 인터뷰. 그는 주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백두산의 전경을 그린다. [사진 최선희]

국경을 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상기시켜

아무튼 두 전시로 인해 한국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으며, 관람객들은 한 나라의 예술이 정치적인 이념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게됐다. 남쪽의 비무장 지대에서 보초를 서면서 야간 투시경으로 바라본 북한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 이세현 작가의 붉은 산수화나 북한으로 자신의 그림을 보내 북한 자수 공예가들에게 수를 놓게 한 함경아 작가의 작품 등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자유롭게 교류하지 못하는 분단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소통이 막혀버린 예술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국경을 넘어서’ 라는 전시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국경을 넘지 못하는 두 나라의 안타까운 현실을 상기시켜 준다.

베른=최선희  초이앤라거 갤러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