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 작가 김환기도 그렸나, 피란 수도 부산의 풍속화 접시

중앙일보

입력 2021.06.12 10:00

업데이트 2021.06.12 12:07

대한도기에서 생산한 풍속화 시리즈 중 연날리기 그림 백자 접시_김환기 추정.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대한도기에서 생산한 풍속화 시리즈 중 연날리기 그림 백자 접시_김환기 추정.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댕기머리를 한 한복 차림 소녀들이 널뛰기를 하거나 수양버들 드리운 시냇가에서 손빨래 하는 풍경이 동그란 접시에 그려져 있다. 방패연을 휘날리는 까까머리 소년들도 보인다. 아예 조선 산수화 풍경을 그대로 갖고 와 한시까지 새겨 넣은 접시도 있다.

부산 영도 위치했던 대한도기에서 일감
변관식·이중섭 등 당대 화가들 생계 해결
민속박물관 '부산 특별전' 8월 30일까지

8월 30일까지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전시는 국립민속박물관‧부산시 공동으로 조선시대 통신사와 왜관(倭館)을 통해 일본과 교류하던 시기로부터 337만 인구가 살아가는 한국 제2의 도시가 되기까지 부산의 역사와 민속‧풍경을 유물‧사진‧영상 등 320여 점에 담아낸다.

이 중 눈에 띄는 게 6‧25 피란 시기 대한도기 주식회사 생산제품들이다. 대한도기는 해방 이후 부산 영도에 건립‧운영된 근대 도자기 회사. 뿌리는 일제 치하 1917년 영도 영선동에 설립된 조선경질도기다. 조선방직과 더불어 부산의 양대 회사로 불리던 조선 최대 도자기 공장이었다. 해방 후 적산관리 대상이 됐다가 1950년 자유당 국회의원 지영진이 4억500만원에 불하받아 사명(社名)을 바꿨다. 이후 10여년간 해외수출은 물론 전국 도자 생산의 70% 이상을 생산하다 업종 쇠퇴 속에 1972년 문을 닫았다.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에 선보인 피란 시기 대한도기의 풍속화 접시들.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에 선보인 피란 시기 대한도기의 풍속화 접시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

부산 영도대교(옛 영도다리) 인근에 노래비가 있는 ‘굳세어라 금순아’(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의 한 대목이다. 대한도기가 자리했던 영선동 인근 영도다리 주변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이 지은 판잣집이 즐비했다. 1948년 50만명이던 부산 인구는 전쟁통에 100만명으로 불어났다. 보따리 하나만 짊어지고 온 사람들은 산비탈은 물론 무덤 위에도 집을 지었다.

이런 피란민 무리 속에 당대 최고의 화가들도 있었다. 생계가 어려웠던 이들은 대한도기에 적을 두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알려진 대표적 인물로는 김은호‧변관식‧김학수‧황영수‧이중섭, 그리고 서울대 교수였던 장우성과 미대생이었던 김세중‧서세옥‧박노수‧장운상‧박세원‧권영우‧문학진 등이 있다. 이들은 대량생산되는 생활도기와는 다른, 장식용 기념품 혹은 수출품으로 제작되는 핸드페인팅 도자 접시 생산에 투입됐다.

대한도기-도자기 문양 넣는 모습. [사진 부산광역시]

대한도기-도자기 문양 넣는 모습. [사진 부산광역시]

대한도기 공장에서 도자기를 생산하는 모습. [사진 부산광역시]

대한도기 공장에서 도자기를 생산하는 모습. [사진 부산광역시]

접시 그림은 유엔군을 비롯한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전통 풍속이 대부분이었다. 널뛰기, 다듬질, 가야금 연주, 베틀짜기, 그네타기, 빨래하기, 팽이치기 등이다. 바둑 두기, 낚시하기 등 한가로운 풍경을 담기도 했다. 자신의 예술적 지향과는 무관하게 밥벌이로 그린 그림이다보니 대부분 작품에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변관식과 이규옥 정도만 확인된다. 대신 많은 화가들은 별호나 이름의 일부를 남겼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인 ‘연날리기’ 백자 접시를 김환기 작품으로 추정하는 이유도 낙관(인장) 위치에 ‘환’이라고 적혀 있어서다. 김환기(1913~1974)는 2019년 132억원에 낙찰된 '우주'로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초로 100억원 대를 돌파한 작가다.

“당시 김환기 등 대다수 피란 작가들이 영도다리 인근 남포동‧중앙동 일대에 거주했는데 이름 있는 화가들의 필력이 필요했던 대한도기와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환’이 김환기란 것은 추정에 불과하지만 당시 많은 화가들이 대한도기 일감을 받아 일한 것은 사실이다.”(부산시립미술관 박진희 학예연구사)

접시는 지름 30~40㎝가 일반적이었으며 대부분의 도안은 김은호의 초안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조선 순종의 어진(御眞)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이당 김은호(1892~1979)는 한복을 입은 고아한 한국여인들을 주로 그렸고 이 같은 인물화 계열 그림들은 대한도기 폐업 직전까지 꾸준히 제작됐다고 한다. 전면엔 그림이, 뒷면엔 회사마크와 제목(‘낚시질 fishing’ 등)이 한글과 영어로 병기됐다. 또 ‘Hand painted’라고 명시해 대량생산 도자기와 구별했다. 많은 외국군인들과 종군기자들이 이를 귀국 선물로 사가서 해외에 한국이란 나라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 전시장 모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의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 전시장 모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의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 전시장 모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의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 전시장 모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의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 전시장 모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의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 전시장 모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이번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 전시엔 종군기자 임응식의 사진, 이북 피란민이 창안한 밀면 제조 도구, 실향민이 그린 ‘고향 지도’, 부산에서 전국으로 퍼진 산업을 보여주는 ‘금성사 라디오(A-501)’와 ‘금성 텔레비전(VD-191)’ 등이 소개된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관련 자료, 밀수품으로 유명했던 국제시장 관련 자료와 영상도 전시된다. 배에 낀 녹을 떼어내는 ‘깡깡이아지매’, 자갈치 시장에서 일하는 ‘자갈치아지매’ 등 부산 여성들의 강인한 삶을 구술 영상을 통해 만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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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담당한 김유선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잘 안다고 생각하는 부산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시각을 얻게 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민속박물관 전시 후엔 부산박물관에서도 9월 14일부터 12월 5일까지 열린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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