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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1시간만에 ‘그건 너’ 가사 뚝딱…쎄시봉 정신적 반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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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호 16면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16〉 소설가 친구

왼쪽부터 최인호·조영남·이장희씨. 2013년 최씨가 세상을 떠나기 3, 4년 전쯤 찍은 사진으로 조영남씨는 기억했다. [사진 조영남]

왼쪽부터 최인호·조영남·이장희씨. 2013년 최씨가 세상을 떠나기 3, 4년 전쯤 찍은 사진으로 조영남씨는 기억했다. [사진 조영남]

나는 지난주 회에 10여 년 전 한꺼번에 세상을 떠난 나의 여자 친구들에 대해 썼다. 서강대 영어영문학 교수 장영희, 나와 함께 그녀의 말년에 화투 그림을 그렸던 김점선, 그리고 나와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던 행복전도사로 알려진 최윤희다. 이들은 어이없게도 2009년부터 불과 몇 개월 차이로 모두가 내 곁을 영영 떠나갔다. 저세상으로 간 거다. 독자님들께서 틀림없이 왜 꼭 당신의 여자친구들만 그렇게 죽을 수가 있는가. 혹 남자친구의 경우는 없었는가 궁금해하실 것 같다.

최인호, 이장희 고교·대학 선배 #동갑이라 일찍부터 ‘야자’ 터 #숫기 없지만 말문 열면 연발총 #‘청바지 문화’란 말 처음 만들어 #통속소설 작가 빈정대도 무반응 #내 방엔 그가 남긴 예수 스케치

이런 때 나는 내 죽은 남자친구들 중에 지면상 유명한 친구들만 따로 골라야 하는 내 입장이 참 원망스럽다.

두 명이 있다. 한 친구는 유명한 소설가 최인호이고 다른 한 명은 유능한 소설가 겸 번역가(주로 그리스 신화) 이윤기다. 둘 다 죽었다.

이번주엔 최인호에 대해서만 쓰겠다. 나이가 같아서 우리는 일찍부터 ‘야자’를 텄다. 남자들은 다 안다. 그게 무슨 뜻인지를.

최인호, 고2 때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

나는 인호가 병원에 다닌다는 소식을 듣기 전쯤 청담동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장어구이 집에서 만나 무려 4시간이나 수다를 떤 적이 있다. 남자의 수다도 여자의 수다 못지않게 요란할 수가 있다. 무슨 얘길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것으로 봐 그냥 너저분한 얘길 했던 것 같다. 원칙적으로는 후배 이장희와 선배 최인호가 만나는 자리에 내가 낀 게 맞다. 인호는 장희의 서울고등학교, 연세대학교 2년 선배였다. 물론 나는 장희를 훨씬 먼저 알게 됐다. 내가 용문고 3 때 내 단짝 친구 이영웅(죽었다)이 자기의 조카(영웅이 형의 아들)가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했다며 자랑을 했는데 그게 이장희였다. 그러니까 인호와 장희는 일류학교 출신이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우리 때는 일류학교와 아닌 학교의 차이가 엄청 컸다.

이장희가 방송에서 어쩌다 가수가 됐냐는 질문을 받으면 삼촌과 함께 살 때 조영남 형이 놀러 와 통기타를 치면서 ‘와이 베비 와이(Why Baby Why)’ 같은 컨트리송을 들으며 나도 커서 가수가 되어야겠다고 말하는 게 바로 그때 얘기다.

인호는 내가 쎄시봉에 들락거릴 때 친분을 트게 됐다. 쎄시봉에서 밖으로 나와 큰길 건너편에 샤모니 빵집과 연다방이 있었는데 거긴 주로 서울고 연세대 출신들의 아지트였다. 나는 장희와 형주(연대의대)의 친분으로 그쪽 그룹에도 낄 수가 있었다.  쎄시봉의 이장희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서유석 한대수 고영수 김민기 조영남 일파의 사실상 정신적 반장이었던 최인호의 첫인상은 좀 복잡했다.

이때 독자님들께선 “아니, 여보쇼! 최인호는 노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왜 최인호가 온통 노래 패거리의 반장이 되었다는 거요?” 하고 물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지금 굳이 이유를 댄다면 그때 우리는 노래 부르기보다 글쓰기를 한 수 위로 뒀던 게 아닌가 싶다. 글쎄 세상 권력구조가 참으로 오묘하다. 그래서 옛날에 글쓰기 대회에서 일등(장원급제)한 사람을 높은 자리에 앉힌 것이 이해가 된다.

그의 첫인상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그가 숫기가 없고 심하게 낯을 가린다는 점 때문이다. 나 역시 숫기가 없는(못 믿으시겠지만) 편이었지만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됐기 때문에 그의 낯가림증이 내 눈에 크게 확대되었던 것 같다.

1998년 최인호씨가 조영남씨에게 그려 준 예수 십자가 연필 스케치. 최씨는 87년 가톨릭에 귀의했다. [사진 조영남]

1998년 최인호씨가 조영남씨에게 그려 준 예수 십자가 연필 스케치. 최씨는 87년 가톨릭에 귀의했다. [사진 조영남]

그러니까 항상 나는 최인호를 보며 ‘저 친구는 도대체 뭐가 못마땅해서 저토록 짜증스런 인상을 쓰고 다닐까’ 할 정도였다. 그는 먼저 말을 거는 타입도 아니었고 더구나 뭘 떠벌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정스럽게 사람 대하는 걸 아주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가 어쩌다 말을 시작하면 연발총 나가듯 재빠르게 해치워 버렸다. 마치 주어와 동사만 구사할 줄 아는 사람처럼 말이다. 우리 때는 PC방 게임방은커녕 디스코텍도 없던 시절. 뭘 했는지도 모른다. 특이한 오락거리가 없던 우린 그저 연다방이나 음악감상실 쎄시봉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일반 다방이나 음악감상실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왜냐면 거길 출입하려면 최소한의 경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부터 쎄시봉 대학생의 밤에서 노랠 불러 티켓을 안 사고 출입할 수 있었지만 이장희와 최인호는 어디서 돈을 구해 그런 델 다녔을까. 궁금해 미국에서 돌아와 울릉도에 들어간 장희한테 전화를 걸었다.

장희는 “아이! 그 정돈 낼 수 있었어!” 하며 인호에 관한 딴 얘기만 늘어놨다.

“인호형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벽구멍’이라는 소설을 써 가작에 입선하며 한국문단에 올라섰었어. 나는 그 옛날 미국에서 인호형을 만나 미국 서부 여행을 함께 했고 그때 인호형이 단편소설 ‘깊고 푸른 밤’을 영화 대본으로 썼었어”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야! 장희야 그땐 몰랐지만 우리가 쎄시봉엘 막 다니기 시작했을 때가 청바지 문화의 시작이었어. 우리가 그때 현장에 있었던 거야” 하니까 장희가 또 “형! 청바지 문화라는 말도 인호형이 만들어냈던 말이야” 한다.

내가 또 “아 참 장희야. 니가 ‘그건 너’ 가사를 인호와 함께 썼다며?” 물었더니 “맞아 형! 내가 1절을 만들어 놓고 강근식과 연습을 하면서 인호형한테 전화를 했더니 한 시간 후에 2절 가사가 왔어”라는 것이다.

‘그건 너’의 1절은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 이렇게 나간다.

인호가 만들었다는 2절 가사는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 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껄껄 웃더군/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이렇다.

장희가 인호의 가사에 탄력을 받아 금방 썼다는 3절 가사는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이거다.

와우! 최인호는 그러니까 노랫말 가사에 음절을 꿰맞출 줄 아는 특이한 재능을 타고났던 거다. 그리하여 이장희와 최인호는 ‘그건 너’를 통해 순수한 우리말로 된 대화체 가사의 틀을 서태지보다 먼저 만들어 오늘날 무서운 랩(언어구사로만의 음악) 음악의 선각자가 된 셈이다.

그때는 차마 몰랐다. 우리가 인호를 향해 통속소설이나 쓴다고 빈정대도 인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예의 두 손을 양쪽 바지 주머니에 찌른 채 혼자 낄낄대며 길가에 빈 깡통만 냅다 걷어차는 게 그의 유일한 대꾸였다.

인호는 불쾌했음에 틀림없다. “뭐! 내가 통속적인 글만 쓴다고?” 하면서 말이다. 얼마 후 그는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을 다룬 5권짜리 장편 『상도』(2000년)를 써 베스트셀러로 떠들썩하더니 곧 TV 드라마로 각색되어 난리가 아니었다. 한 작가가 소설을 써 우리나라에서 그토록 영화나 TV 드라마로 자주 연결된 경우는 최인호가 단연 최상이었던 거다. 뿐인가. 그는 『유림』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을 쓰며 우리네 민족의 정신세계까지 쥐락펴락해댔다. 나는 사실 ‘유림(儒林)’의 ‘유’자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거라곤 중국 성인 중엔 공자 맹자 노자 장자처럼 ‘자’로 끝나는 인물이 많다는 것 정도다.

나는 최인호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켕기는 게 있다. 나는 언젠가 인호더러 “문학에서든 종교에서든 네가 우리의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데 왜 하필 중국 쪽에 가서 공자 맹자 탱자탱자하고 있느냐, 빨리 뛰쳐나와 우리 쪽의 중심이나 잡아라” 이런 식으로 주제넘은 조언이랍시고 해댄 것이 못내 켕긴다는 얘기다.

평소 그가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친구가 아니라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시라. 고2 때 그렇게 어렵다는 신춘문예의 문턱을 넘어선 꼬마 셰익스피어가 영화 ‘별들의 고향’의 술집 호스티스 아가씨 경아를 탄생시켰으니 한국 문학계가 얼마나 발칵 뒤집혔겠는가. 그다음부터는 TV 드라마, 심지어는 영화계까지 독보적으로 휘저었으니 우리는 그때 최인호와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쭐했을 정도다. 인호는 상업 쪽으로 너무 치우쳤다는 평판이 싫어 평단과 인연을 끊고 『상도』 같은 역사소설을 쓰게 됐다.

까칠한 친구가 기독교에 귀의해 놀라

인호는 나의 예상을 깨고 일찌감치 80년대에 마지막 구원을 그리스도로 단정해 버려 나는 놀라 자빠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도 석가도 공자도 아니고 오로지 유일한 건 그리스도라고 설파했다. 그런 사정을 은밀하게 나한테 털어놨다. 믿어지질 않았다. 저 까칠한 친구가 어울리지도 않을 법한 기독교에 빠지다니. 최인호와 예수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나중에 나는 또 이번엔 놀라 자빠지는 게 아니라 까무러치게 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나라 전체에서 우리네 삶에 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온갖 방면에서, 모든 사안에서, 옳고 그름을 손톱만큼의 오차도 없이 지적해주곤 했던 삶의 최고의 테크니션 이어령 교수까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거다.

이쯤에선 우리 중앙SUNDAY 독자님들께서 “야! 영남아. 너도 한때 빌리 그레이엄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쪽에 빠진 적이 있지 않았더냐” 하실 것이다.

그렇다! 나는 뱃속부터 빠졌었다. 나도 한때 한국기독교 이래서는 안 된다, 내가 나서서 루터나 칼뱅처럼 개혁해야 한다며 큰맘 먹고 몰래 한 번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순찰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수천의 사람들이 양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는 소리를 듣고 그 길로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개혁을 한다면 손을 들고 아멘! 하는 사람들을 내가 치유해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되는 데 나한테는 당장 그런 대안이 1도 없는 것이다.

생뚱맞은 소리지만 그림은 위대하다. 예술은 진짜 영원한 것 같다. 인공위성 인공지능 하는 시대에도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의 값이 끄떡없이 3조원(어느 일본 평론가가 매긴 값이다)을 견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그만한 가치의 그림 한 점을 소유하고 있다. 23년을 내가 잠자는 방에 걸어 놓고 살아왔다. 연필 스케치인데 태양 아래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그림이다. 그림 속 사인한 날짜는 1998년으로 적혀 있고 작가 사인은 분명 최인호로 되어 있는데 글은 잘 썼지만 최인호의 글씨는 더럽게 악필이다.

“인호야 잘 있지? 지금 니가 옛날에 내 방에 앉아서 끄적거린 그림을 보고 있다. 인호야! 나 어저께 백신주사 맞았다. 응! 쪼금 더 살려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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