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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카리스마? 매스미디어 이점 활용 덕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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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 7월24일 중앙청에서 한복을 입고 취임사를 읽고 있다. [중앙포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 7월24일 중앙청에서 한복을 입고 취임사를 읽고 있다. [중앙포토]

1945년 10월 우남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자 허헌, 이강국 등 좌익 인사들은 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들뿐이 아니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안재홍의 국민당, 김성수의 한국민주당 등 여러 정당은 해방 직후 민족 통일 전선을 모색하면서 이승만을 최고지도자로 추대하는 데 동의했다. 같은 시기 선구회라는 단체가 한 달에 걸쳐 서울에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도 대통령 후보 1위에 올랐다.

신간 『 우남 이승만 평전-카리스마의 탄생』 #"미국 라디오 방송으로 국내서 권위 획득" #"이승만의 카리스마는 후천적 노력 결과"

통상 이승만에 대해서는 임시정부와 불화를 빚고, 미국에서 외교독립론을 추구하면서 국내에는 별다른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해방 직후 전개된 각종 상황을 보면 이승만은 한반도에서 압도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러한 이승만의 카리스마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신간『 우남 이승만 평전-카리스마의 탄생』은 이승만이 겪은 성공과 좌절을 통해 특유의 카리스마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활용되었는지를 추적한 책이다. 10일 저자 이택선 충남대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연구원을 만나 들어봤다.

-경쟁 세력보다 국내 정치 기반이 약했는데, 어떻게 권위를 인정받았나
=정치에서 대중매체가 여론 권력을 형성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가장 빨리 이해하고 활용한 것이 이승만이었다. 그는 1942년 6~7월 '미국의 소리(Voice of Korea)' 방송을 통해 한국어와 영어로 광복군의 활동을 알리는 육성 방송을 했다. 이 방송이 국내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구한말 '대한매일'에서 기자이자 주필로 활동하며 인지도를 높였던 이승만은 새로운 미디어로서 라디오가 한반도에 정보혁명을 가져오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당시 라디오가 여론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었나?
=1941년 12월 말 기준 국내에서 라디오 수신기를 보유했던 한국인이 14만1354명이나 됐다. 당시 라디오를 갖고 '미국의 소리'를 들었던 이들은 대개 여론주도층이었다. 이승만에 대한 명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이유다. 참고로 이승만과 함께 국내에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여운형도 조선중앙신문이라는 언론사의 사장이었다. 당시 미디어가 정치에 끼치기 시작하던 사회 변화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승만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잘 알려져 있다. 선천적 재능인가?
=그렇지 않다. 좌절을 통해 부단한 노력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는 조직을 장악하는데 아주 서툴렀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이상룡, 이동휘, 안창호 등 본인보다 연배가 높거나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인물들 사이에서 조직을 장악하는 데 매우 애를 먹었다. 1925년 상해임시정부에서 대통령 자리를 박탈당했을 때 조소앙은 쿠데타라도 하라고 촉구했고, 윤치영은 터키의 케말 파샤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 본인이 카리스마를 획득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 같다.

해방정국 주역들인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하지(1945년 11월 24일, 김구 귀국 다음 날). [중앙포토]

해방정국 주역들인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하지(1945년 11월 24일, 김구 귀국 다음 날). [중앙포토]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임시정부에서 곤란을 겪은 뒤 그는 하와이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한인들을 모아 '동지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는데, 종신 총재에 취임한다. 이것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이다. 또 자신에 대해 등을 돌린 이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승만은 후원세력이던 한민당이 1947년 미 군정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에 참여하면서 고립된 적이 있다. 이후 자유당을 만들어 한민당을 내치고 야당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좌우합작에 호의적이었던 김규식,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한 김구 모두 정치적 대가를 치렀다. 그런 점에서 히어로물의 '배트맨'과 닮은 면이 있다.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고 싶어했지만 시련을 겪으며, 목표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방식을 써야한다고 확신하고 흑화하기도 하는 면에서다.

-역효과는 없었나
=그의 치명적 약점은 설득과 타협 능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남들이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만 생각했지 자신이 남들과 더불어 일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훗날 그의 정적이 된 김구, 윤보선, 조소앙, 신익희 등을 보면 모두 한때 열렬한 이승만의 지지자였던 인물들이다. 그가 끝까지 주변에 둔 인물들은 대개 이기붕 같은 비서형 인물들이다. 기독교적 신앙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사명'을 위해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이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면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런 자기 확신이 위기를 뚫고 나가는 돌파구가 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무너지게 만들었다.

 『 우남 이승만 평전-카리스마의 탄생』 [사진 도서출판 이조]

『 우남 이승만 평전-카리스마의 탄생』 [사진 도서출판 이조]

-이승만의 카리스마가 무너진 결정적 요인은 무엇인가
=이승만의 정치적 정점은 6·25 전쟁 후반인 1952년부터 1954년까지다. '북진통일'이라는 구호로 국내 여론을 결집했고, 김규식·조소앙 같은 경쟁자들이 납북되면서 적수가 거의 사라졌다. 이승만보다 15~20년가량 연배가 낮은 세대만 남았다. 그를 제어할 인사가 없었던 셈이다. 자신감이 생기니 독주하며 무리수를 두는데 대표적 사건이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이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민주주의적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가 무너졌다. 또 같은 해 7월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을 했는데 여기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공산주의와의 전쟁을 외쳤다. 33차례나 박수를 받았고, 브로드웨이에서 환영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큰 환대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한국에서의 전쟁에 심한 피로감을 느낄 때였다. 미국은 한국 지도자로서 이승만은 위험하다는 확신을 하게 됐고 실제로 이후 한국 정치계에 '이승만이 아니어도 지원할 수 있다'는 시그널을 보낸다. 다시 말해 정점에 있다고 생각했을 때가 바로 위기의 시작이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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