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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대선후보들 ‘소신 발언’에 한·일 관계 멍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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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의원은 9일 서울 용산역 귀빈실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와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의 소송을 각하한 판결을 "잘못된 판단"으로 규정하며 해당 판사의 정치관을 비판했다. [뉴스1]

이낙연 의원은 9일 서울 용산역 귀빈실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와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의 소송을 각하한 판결을 "잘못된 판단"으로 규정하며 해당 판사의 정치관을 비판했다. [뉴스1]

“판사의 판단은 편향된 정치관을 가진 것이 아닌가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인 이낙연 의원은 지난 7일 강제징용 피해자·유족들이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한 서울중앙지법 판결을 이같이 평가했다. 판결 이틀 뒤인 9일 서울 용산역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변호인 등과 가진 간담회 자리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이 의원은 이번 판결을 “잘못된 판단”으로 규정하며 “상급심에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이 의원의 발언은 법원이 '소송을 통한 강제징용 피해자의 청구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은 데 대한 반발로 풀이된다. 국무총리 시절부터 강제징용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그로서는 법원마저 피해자의 억울함을 외면했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의원은 판결을 규탄하는 발언을 통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아픔을 함께하는 정치인’의 이미지를 얻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세운 “법원의 판단은 늘 존중받아야 한다”(지난 2월 10일, 김은경 전 환경부장관 징역형 판결에 대한 입장)는 원칙은 져버렸다. 나아가 정권의 이익이나 여론의 흐름과 부합하는 판결에 대해서만 '사법부 판단 존중'이라는 원칙을 적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상황 따라 달라지는 "사법부 판단 존중"

2018년 10월 30일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직후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중앙포토]

2018년 10월 30일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직후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 의원은 이번 각하 판결과는 정반대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에 대해선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심지어 2019년 2월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일한의원연맹 회장이 대법원 판결에 항의하자 “재판에 졌다고 판결을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랬던 이 의원이 이제 와 판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내로남불'에 해당한다.

집권여당 대표를 지낸 유력 정치인의 이같은 발언은 국내의 반일 정서를 자극할 소지가 충분하단 점도 문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침략행위 앞에서 청구권에 대한 법리를 먼저 따지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상황은 과거사 문제를 현안과 분리해 한·일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투트랙 원칙에 어긋난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강제징용 피해를 놓고 서로 다른 두 개의 판결이 공존하는 상황 자체만으로도 어려움이 큰데, 판결을 놓고 찬반 대립이 격화되며 여론이 분열되는 상황은 최악의 결론”이라며 “반일 감정이 한·일 간 과거사 문제와 현안 모두를 집어삼키며 투트랙 원칙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반일 선명성 경쟁 나선 민주당 대선후보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도쿄 올림픽 보이콧 필요성을 주장하며 반일 선명성 경쟁에 나섰다. (왼쪽부터) 이재명 경기지사, 이낙연 의원, 정세균 전 국무총리. [중앙포토]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도쿄 올림픽 보이콧 필요성을 주장하며 반일 선명성 경쟁에 나섰다. (왼쪽부터) 이재명 경기지사, 이낙연 의원, 정세균 전 국무총리. [중앙포토]

최근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도쿄 올림픽 보이콧 주장 역시 한·일 갈등 사안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모습으로 비친다. 특히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이낙연 의원, 이재명 경기지사까지 민주당 유력 대선후보들이 일제히 도쿄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 필요성을 강조하며 반일 선명성 경쟁에 나서는 분위기다. ‘독도 문제와 올림픽 참여를 분리해서 생각하자’고 주장할 경우 친일로 몰리는 분위기까지 형성됐다.

정치권에서 경쟁적으로 올림픽 불참 분위기를 조성하는 와중에도 한·일 관계 주무부처인 외교부는 지난 8일 “독도는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의 영토”라면서도 “도쿄올림픽 불참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 갈등과 올림픽 참여 문제를 분리해서 접근하겠다는 취지다.  

대선 후보 입장에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억지에 답답함을 느끼는 국민을 위해 ‘사이다 발언’을 쏟아내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휘발성 높은 주제 중 하나인 ‘반일 정서’를 자극하며 선명성을 드러내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지난 4년여간 계속된 ‘한·일 갈등→국내 정치권 반발→반일 정서 점화→정부의 동조→한·일 대결 구도 가속화’의 악순환을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한·일 관계가 역대 최악이라고 불린 지도 한참이 지났다. 한·일 관계를 가로막는 진짜 장애물은 강제징용·위안부 등 과거사 갈등도, 독도 영유권 분쟁도 아닌 정치인의 입인지도 모른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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