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차 한 홉이 쌀 한 말’ 함양의 진상품 민원 풀어준 김종직

중앙일보

입력 2021.06.10 11:00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02)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18대 종손인 김진규 씨가 경북 고령군 쌍림면 개실마을 종택에서 선조를 회고하고 있다. [사진 송의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18대 종손인 김진규 씨가 경북 고령군 쌍림면 개실마을 종택에서 선조를 회고하고 있다. [사진 송의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 선생은 애민을 바탕에 둔 실천유학자였다. 물론 점필재를 역사 속에 각인시킨 것은 그의 나이 27세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란 글이다. 그는 그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초나라 의제(義帝)에 비유하며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했다. 조의제문은 연산군 시기 사초에 올려져 무오사화를 부르고 점필재의 제자들은 끔찍한 능지처참 등을 당한다.

그러나 기실 점필재는 문장으로 도학을 일으킨 조선 초기 사림의 종장이었다. 동시에 과거에 급제한 뒤 홍문관 교리, 지방 수령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까지 오른 뛰어난 관료이기도 했다.

그는 1471년(성종 2) 41세에 함양군수로 나가 선정을 펼친다. 대표적인 것이 지리산 다원(茶園) 조성이다. 당시 함양군민은 해마다 진상품으로 나라에 차를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함양은 차가 전혀 나지 않았다. 백성들은 해마다 전라도에서 쌀 한 말과 차 한 홉을 바꾸어 바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김종직은 부임 첫해 폐단을 알고 백성들에게 차를 부과하지 않고 관이 구해다가 나라에 바쳤다.

점필재가 생전에 사용한 매화연 벼루. [사진 대가야박물관]

점필재가 생전에 사용한 매화연 벼루. [사진 대가야박물관]

이후 김종직은 『삼국사』를 읽다가 “신라 때 차 종자를 당나라에서 얻어다가 나라에서 지리산에 심도록 명했다”는 기록을 발견한다. 함양이 바로 지리산 아래인데 어찌 신라 때 심은 종자가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는 그때부터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를 묻다가 드디어 엄천사(嚴川寺) 북쪽 대숲에서 차나무 두어 그루를 찾아낸다. 점필재는 기뻐하며 그 땅을 다원으로 만들도록 했다. 근처가 모두 민전이어서 이를 사들이고 관전으로 보상해 주었다. 토지 이용의 정석이다. 몇 년이 지나 차가 두루 퍼지니 4~5년 뒤에는 나라에 바치는 물량을 충당할 만했다. 이 일로 ‘차밭’이란 시를 짓는다.

“대숲 밖 거친 동산 100여 평의 언덕/자영차 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무이차 같은 명다(名茶)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라네”

김종직은 또 직무를 보는 여가에 젊은이와 어린이를 선발해 강독하게 하고 또 가르쳤다. 제자 김굉필과 정여창이 배움을 청한 것도 이 무렵이다. 부임 이듬해는 양로연을 베풀고, 문인들과 4박 5일 지리산을 일주한 뒤 ‘유두류록(遊頭流錄)’이란 명문을 남긴다.

점필재 사후에 내려진 영의정 증직 교지. [사진 대가야박물관]

점필재 사후에 내려진 영의정 증직 교지. [사진 대가야박물관]

부임 5년 차에는 함양성의 나각(羅閣, 성안의 주요 건물) 수리 방식을 바꾼다. 나각은 모두 243칸이었다. 그동안은 칸마다 세 집이 함께 풀로 덮어 지붕을 이었다. 그런데 이게 비바람에 무너지면 비록 농사철이어도 우마차에 볏짚과 재목을 싣고 와 수리를 하곤 했다. 백성들은 이런 일이 되풀이되자 매우 고달팠다. 김종직은 지역 원로와 상의해 나각 한 칸에 열 집을 배정해 썩은 재목을 바꾸고 기와를 이도록 했다. 그렇게 하니 한 집에서 기와 10장만 내놓으면 충분했고 5일도 되지 않아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새로운 방식에 의아해했으나 일이 끝난 뒤 모두 좋아했다.

김종직은 승문원사로 발탁돼 중앙으로 떠난다. 함양 사람들은 이후 그의 덕과 선정을 사모해 살아 있는 사람의 ‘생사당(生祠堂)’을 짓고 초하루와 보름에 참배했다고 한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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