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음주청정지역’ 제대로 할 때 됐다

중앙일보

입력 2021.06.10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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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염태정 EYE 디렉터

염태정 EYE 디렉터

10년 전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UNC)로 1년간 연수를 갔는데, 오리엔테이션에 술을 조심하라는 게 있었다. 술병이 보이게 들고 다니면 안 된다, 술 취해 비틀거리며 다니지 말아라 같은 거였다. 한 번은 연수자 가족들이 함께 공원에 놀러 갔다. 고기를 구워가며 술을 마시는데, 멀리서 제복 입은 사람이 순찰 도는 모습을 보고 부랴부랴 술을 감추기도 했다. 위스키나 보드카를 사려면 전문점에 가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사야 했다. 한국처럼 밤늦게 여럿이 모여 술을 진탕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술에 관한 한 재미없는 1년이었다.

한강 대학생 안타까운 죽음
예방적 차원 음주 대책 필요
세계 최고수준 음주문화 바꿔야

술 관련 규제가 앞으로 더 세진다. 주류 광고 제한 등을 담은 ‘국민건강증진법 시행령 일부 개정안’이 8일 국무회의를 통과해 이달 말부터 시행된다. TV뿐 아니라 인터넷멀티미디어방송(IPTV), 이동멀티미디어방송(DMB)에서도 오전 7시~오후 10시 주류 광고를 할 수 없다. 버스·지하철·택시 광고도 제한된다. 지방자치단체 조례로 금주 구역을 정하고 위반하면 10만원 이내에서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게 했다.

이런 규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미 60개 넘는 지자체가 ‘음주 청정지역’ 조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사문화된 조례다. 서울시는 2017년 ‘건전한 음주문화 조성에 관한 조례’를 만들어 ‘음주 청정지역’을 지정했다. 남산공원 등 22곳이 대상이다. 한강공원은 아직 아니다. 음주로 심한 소음·악취를 나게 하는 등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사람에게 10만원 이내에서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과태료를 부과한 적은 없다.

서구 선진국의 음주 규정은 우리보다 엄격하다.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주(州)에서 공공장소 음주를 금지할 뿐 아니라 음주가능 나이도 만 21세로 우리보다 높다. 1984년 최소 법적 음주연령법이 만들어지면서다. 그전엔 주별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다양했다. 하지만 음주 연령이 낮은 지역에서 청소년 교통사고가 자주 나는 등 여러 문제가 생겨 만 21세로 통일했다.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는 공공장소에 술에 취해 나타날 경우 100달러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 재범일 경우엔 60일 이내 감옥살이에 처할 수 있다(‘음주문화 특성 분석 및 주류 접근성 개선 보고서’, 2018).

서소문 포럼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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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인한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살인·강도·강간 같은 흉악 범죄의 30%가량은 음주 상태에서 저질러진다. 음주로 인한 폐해를 막아보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쉽지 않다. 미국 금주법(1919~1933)이 대표적이다. 앵글로 색슨계 신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금주당(Prohibition Party)과 술로 가산을 탕진하고 폭력을 일삼는 남편에 맞서 여성들이 조직한 술집반대동맹(ASL)이 금주법을 주도했다. 하지만 금주법 시행은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결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재임 1933~1945)에 의해 폐기됐다.

조선 후기 영조(재위 1724~1776)도 강력한 금주령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금주령을 어기고 술을 빚고 마셨다고 많은 사람을 유배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됐다.

우리 음주 문화는 어느 나라보다 관대하다. ‘고위험 음주’도 상당하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선 순수 알코올 기준으로 남자 60g, 여자 40g 이상을 고위험 음주로 본다. 알코올 도수 17%인 소주를 기준으로 하면 남자 8.8잔, 여자 5.9잔에 해당한다. 그 정도 마시는 사람 주변서 흔히 볼 수 있다. 몇 년 전 중동 알자지라 방송이 한국의 음주 문화를 다룬 ‘한국의 숙취’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강 공원에서 실종됐다 숨진 채 발견된 손정민씨의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공공장소 금주 논의가 활발하다. 개정된 국민건강증진법 시행이 맞물리면서 힘을 얻고 있다. 음주 규제에 대한 반론은 만만치 않다. 개인의 선택과 행복을 침해하는 것이고, 음주로 문제가 생기면 처벌하면 되는데 지나치다는 거다. 그렇다 해도 이젠 세계 최고 수준의 음주에 제동을 걸고, 사후 처벌적 대처가 아니라 예방적 차원의 대책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선언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각 지자체의 청정 음주구역도 제대로 해 볼 필요가 있다. ‘재미없는 천국보단 재미있는 지옥이 좋다’ 라고 할 때, 재미의 주 요소로 음주가 자주 꼽힌다. 많은 사람이 아쉽겠으나 술에 관한 재미없는 천국 쪽으로 가야 할 듯하다.

염태정 EYE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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