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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 3년 전엔 “사법부 존중”…이번 소송 각하엔 “조선총독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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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21.6.9 오종택 기자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21.6.9 오종택 기자

“이게 조선총독부 경성법원 소속 판사가 한 판결인지 의심이 갔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일 오전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서울중앙지법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각하 판결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송 대표는 “법원조직법상 하급심 법원은 대법원의 판례를 존중하도록 되어있다”며 “소부의 판결도 아닌 전원합의체 판결을 1심 판사가 이렇게 부정한 것은 상당히 우려스럽다. 다시 조선총독부 시대로 돌아가는 판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지적했다.

변호사 출신인 송 대표는 이어 “판결에 쓸데없이 정치적인 언어들이 많이 들어갔다”며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지난 7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34부(김양호 부장판사)를 겨냥한 비판이었다.

전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반국가, 반민족적 판결을 내린 김양호 판사의 탄핵을 요구합니다’ 청원에는 이날 오후 5시 기준 23만여 명이 참여했다. 친여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엔 김 부장판사의 사진과 개인 신상정보도 올라왔다. 민주당 의원들 역시 “대체 어느 나라 재판부인가”(김원이), “역사를 부정하고, 식민사관에 경도된 매국적 판결”(홍영표)이라며 재판부 비판에 가세했다.

與 대선 후보들이 앞장서 재판부 비판

판결에 대한 여권의 비판은 대선 후보들이 주도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전날 오전 페이스북을 통해 “정말 개탄스럽다”며 “일본 정부와 일본법원이 주장하고 있는 논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 참으로 유감”이라고 밝혔다.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비판은 여당 대선 후보들이 주도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오른쪽)은 "정말 개탄스럽다"고 했고, 추미애 전 법무장관(왼쪽)은 "대한민국 판사가 아니라 일본국 판사의 논리"라고 했다. 사진은 지난해 7월 국회 본회의장을 나서는 두 사람의 모습. 오종택 기자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비판은 여당 대선 후보들이 주도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오른쪽)은 "정말 개탄스럽다"고 했고, 추미애 전 법무장관(왼쪽)은 "대한민국 판사가 아니라 일본국 판사의 논리"라고 했다. 사진은 지난해 7월 국회 본회의장을 나서는 두 사람의 모습. 오종택 기자

이어 판사 출신인 추미애 전 법무장관은 재판부 실명을 직접 언급하며 비판했다. 추 전 장관은 “김양호 판사가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나, 소송을 제기할 수는 없다’고 한 것은 대한민국 판사가 아니라 일본국 판사의 논리”라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이후 여권 대선 후보들은 “걱정 많은 법원이 걱정”(이광재), “비상식적 판결”(최문순), “일제 강제징용 1심 판결, 바로잡아야 한다”(이낙연) 등 차례로 비판 글을 이어갔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이날 강제징용 피해 유족들과 직접 만난 직후 “법원은 법원의 일을 하면 되고, 외교부는 외교부의 일을 하면 된다. 법원이 외교부의 일까지 하려고 한 것이 이번 판결의 또 다른 잘못”이라고 말했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일 오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간담회‘를 마치고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강길 변호사, 장덕환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자 연합회 회장, 이 전 대표, 김천영 유가족 대표, 윤영찬 의원. 뉴스1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일 오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간담회‘를 마치고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강길 변호사, 장덕환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자 연합회 회장, 이 전 대표, 김천영 유가족 대표, 윤영찬 의원. 뉴스1

다만, 이재명 경기지사, 양승조 충남지사,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이에 대해 특별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3년 전엔 與 “사법부 판단 존중”

정치권 일각에선 여당의 1심 판결 비판이 과도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삼권분립 원칙을 존중해 법원 판결엔 일단 ‘존중한다’고 표현했던 게 그간 정치권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보좌관은 “판결 자체도 논란거리지만, 아무래도 대선 경선이 임박하다 보니 비판의 강도가 커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 2018년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렸을 때 당시 정부·여당은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낙연 당시 국무총리는 “정부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에 관한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며, 관련 사항들을 면밀히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고, 민주당은 “지극히 당연한 판결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논평을 냈다.

‘사법부 존중’은 앞서 청와대가 2019년 한·일 양국 기업과 국민(1+1+α)이 자발적으로 낸 성금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이른바 ‘문희상안(案)’을 거부할 때도 핵심 논거였다. 당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제일 중요한 것은 대법원 판결이 존중돼야 한다는 것”이라며 “‘문희상안’이 시행되더라도 일본 가해 기업이 참여하지 않거나,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가 강제집행 절차를 강행할 경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학계에선 보다 유연한 접근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재판부가 청구권은 인정하면서 소를 제기할 수 없다고 한 건, 결국 행정부와 입법부의 정치적 해결을 주문한 것”이라며 “여당도 이념적으로만 접근할 게 아니라, 한·일 관계 개선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실용적인 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현석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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