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판결 후폭풍…日 언론 "외교로 풀자"는데 국내선 "조선총독부 판결" 맹비난

중앙일보

입력 2021.06.09 16:57

강제징용 피해자·유족 85명이 제기한 소송을 각하한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의 판결로 ‘반일 감정’이 재점화하는 조짐이다. 여당발 비난이 거세지며 모처럼 한·일 관계 개선의 기회를 맞은 정부도 보다 신중한 입장으로 돌아서는 분위기다.

여당에선 송영길 대표가 앞장섰다. 그는 판결 직후 “조선총독부 경성법원 판결인지 의심된다”는 표현까지 동원해 판결을 맹비난했다. 해당 판사를 탄핵하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글은 하루만에 20만명 넘게 동의했다.

하루 만에 확 바뀐 '외교부 입장' 왜?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이 지난 8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 "앞으로의 동향을 주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날 "사법 판결과 피해자 권리를 존중하고 한일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일본 측과 관련 협의를 지속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하루만에 공식 입장의 내용과 톤이 확 달라졌다. [뉴스1]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이 지난 8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 "앞으로의 동향을 주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날 "사법 판결과 피해자 권리를 존중하고 한일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일본 측과 관련 협의를 지속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하루만에 공식 입장의 내용과 톤이 확 달라졌다. [뉴스1]

판결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한 듯 외교부는 하루 만에 공식 입장을 수정했다. 외교부는 당초 7일 판결 직후 “사법 판결 존중” “한일 관계 고려”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열린 입장으로 일본 측과 관련 협의를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튿날인 지난 8일엔 기존 입장문에 담긴 내용을 대부분 삭제한 채 “앞으로의 동향을 주시하겠다”는 수정된 입장을 발표했다.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는 내용도, 일본과 협의하겠다는 내용도 모두 제외됐다. 사실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표현은 가장 원론적인 수준의 입장 표명인데, 이 부분조차 빠지면서 오히려 입장이 달라진 배경을 두고 의문이 증폭됐다. 하루 만에 공식 입장이 수정된 이유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제반 상황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나온 입장이다”이라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사유는 밝히지 않았다.

'외교적 해법' 여지 생겼지만… 

외교가에선 지난 7일 각하 판결 이후 강제징용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해법’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비록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이 180도 뒤집히며 동일한 사건에 대한 두 개의 판결이 공존하는 혼란은 당분간 불가피하지만, 그와 별개로 강제징용 문제를 사법의 영역이 아닌 한·일 간 대화의 장에서 풀어나갈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청구권은 인정하되, 이를 소송의 형태로 행사할 수 없다는 서울중앙지법 판결은 일본 측의 입장과 동일하다. 지난 7일 각하 판결을 통해 사법적 영역에서 한일 간 합의에 이를 여지가 생긴 셈이다. 사진은 서울중앙지법의 각하 판결 이후 기자회견에 나선 강제징용 피해자 유가족. [연합뉴스]

강제징용 피해자의 청구권은 인정하되, 이를 소송의 형태로 행사할 수 없다는 서울중앙지법 판결은 일본 측의 입장과 동일하다. 지난 7일 각하 판결을 통해 사법적 영역에서 한일 간 합의에 이를 여지가 생긴 셈이다. 사진은 서울중앙지법의 각하 판결 이후 기자회견에 나선 강제징용 피해자 유가족. [연합뉴스]

특히 ‘강제징용 피해자의 청구권은 유효하지만, 소송을 통해 이를 행사할 권한은 없다’는 재판부의 각하 사유는 2007년 일본의 대법원 격인 최고재판소의 판단과도 궤를 같이 한다. 이에 일본 기업의 자발적 지원 등 해법 도출을 위한 최소한의 여건이 조성된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다. 또 재판부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을 뿐이지 피해자의 청구권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한 것은 사법부는 뒤로 물러서는 대신 행정부나 입법부 차원에서 피해자를 위한 해법 마련에 나설 여지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일본 내에서도 ‘외교적 해법’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피어났다. 일본 도쿄신문은 9일 ‘외교적 해결밖에 길은 없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사법 판단에만 의존하지 말고 외교 협상을 통해 고령인 원고에 대한 구제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미우리신문 역시 이날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부에 휘둘리지 말고 책임을 다해 한일 간 현안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도했다.

다만 외교적 해법을 촉구하는 일본의 주장엔 한국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선제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전제가 깔렸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이 지난 7일 판결 직후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측의 구체적인 대안을 주시할 것”이라고 말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국내 정치에 연동된 한·일 관계 

강제징용 소송을 각하한 판결에 대해 국내에선 재판부에 대한 비난과 함께 반일 정서가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등 정치권에서도 이를 자극하며 강제징용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해법의 틈이 다시 닫힐 위기에 놓였다. 사진은 광주지역 시민 사회단체 관계자들이 9일 오후 광주 동구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소송 각하 결정을 규탄하는 모습. [연합뉴스]

강제징용 소송을 각하한 판결에 대해 국내에선 재판부에 대한 비난과 함께 반일 정서가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등 정치권에서도 이를 자극하며 강제징용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해법의 틈이 다시 닫힐 위기에 놓였다. 사진은 광주지역 시민 사회단체 관계자들이 9일 오후 광주 동구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소송 각하 결정을 규탄하는 모습. [연합뉴스]

하지만 국내에서 판결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정치권이 이같은 여론에 기름을 붓는 상황은 일본과의 협의를 위한 대안 제시라는 측면에서 정부의 부담을 키울 가능성이 크다. 특히 내년 3월 대선을 9개월여 앞둔 상황에서 청와대가 국내의 반일 정서를 무릅쓰고 일본 측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외교적 해법의 틈이 생겼지만, 한·일 모두 현실적 해결책 마련에 본격적으로 임하기보다는 문재인 정부의 잔여 임기 동안 더 이상의 상황 악화만 막는 식으로 관리하자는 사실상의 대치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북한의 도쿄올림픽 불참이 사실상 확정된 것 역시 한국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설 동력이 떨어졌다는 점에선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8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북한의 올림픽 불참을 기정사실화하고 북한에 제공됐던 출전권을 다른 나라의 선수들에게 재분배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이번 도쿄올림픽에선 과거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당시 남북 선수단이 개회식에 공동으로 입장하고 단일팀을 구성하며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된 것과 같은 모습은 보기 어렵게 됐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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