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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선희의 문화 예술 톡

남한과 북한의 예술 사이에 놓인 국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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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최선희 초이앤라거 갤러리 대표

최선희 초이앤라거 갤러리 대표

필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인 스위스의 베른 시에서 남북한의 현대 미술을 함께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베른 현대 미술관에서는 ‘국경을 넘어(Border Crossing)’라는 제목으로 스위스 출신 컬렉터 울리 지그씨가 소장해온 남북한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베른은 김정은이 어려서 유학 생활을 했고 전 세계 도시 중에 드물게 남한과 북한 대사관이 함께 있는 도시다. 스위스가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는 중립국이라는 점이 이 전시를 가능하게 했을까?

이세현의 Between Red 33, 2007.

이세현의 Between Red 33, 2007.

유럽에서도 인기를 끈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리정혁 동지와 남한의 사업가인 윤세리가 스위스에서는 자유롭게 만난 것처럼. 스위스 현지 언론뿐 아니라 뉴욕 타임스나 아트 넷 등의 해외 언론들도 이 전시를 주목하고 있다. 중국에서 오래 대사 생활을 하면서 중국 현대 컬렉터로 명성이 자자한 울리 지그씨는 북한 주재 스위스 대사로 있으면서 북한의 현대 미술과 남한의 동시대 미술 작품들을 소장해왔다. 한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증거로서 미술품을 소장해 온 그에게 동시대 남북한 예술품을 함께 소장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리승호 등 작가 그룹의 The Year of Shedding Bitter Tears, 2006.

리승호 등 작가 그룹의 The Year of Shedding Bitter Tears, 2006.

필자는 2010년 빈에서 열린 대규모 북한 현대 미술 전시를 관람하면서 강력한 정치적인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북한 현대 미술의 현재를 목격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베른 전시처럼 남한과 북한의 현대 미술이 나란히 전시되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약 4000명의 화가들이 소속된 만수대 창작소에서 제작된 것이 대부분인 북한의 작품들은 최고 지도자들을 우상화하는 작품들과 매우 수려한 기술로 그려진 산수화나 풍경화로 제한된 장르를 보여준다. 반면 이세현·이수경·함경아·전준호·정연두·신미경·김인배·허은경 등 14명의 남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주제와 재료·기법 등이 매우 자유롭고 다양해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한 담론을 쏟아내고 있다.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나 편견을 버리고 현 시대를 반영하는 예술의 서로 다른 면을 관람객이 발견하기를 바랐다는 베른 미술관 큐레이터의 기획 의도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전시를 감상하기에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분단된 두 나라에서 예술이 지니는 의미의 간극이 너무나 벌어져 있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예술가들에게 창작에 대한 본능은 우리 삶에 놓인 물리적·정신적 국경이나 이념의 경계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와, 때로는 한 시대를 거침없이 비판하고, 부조리를 예술로 일깨우려 하는 용기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는 절대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놓인 물리적 국경보다 더 굳게 닫혀버린 예술의 장벽은 당분간은 쉽게 넘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최선희 초이앤라거 갤러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