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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세대 중 한집뿐"···현충일이 알려준 2021년 태극기 현실

중앙일보

입력

“현충일에 인왕산에 올라 주변 아파트에 태극기가 걸려있나 봤는데 찾기 어렵더라. 그래도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인데…”

66회 현충일인 6일 오전 서울시내 한 아파트 단지에 대부분 조기가 게양돼 있지 않다. [뉴스1]

66회 현충일인 6일 오전 서울시내 한 아파트 단지에 대부분 조기가 게양돼 있지 않다. [뉴스1]

서울 종로구에서 태극기 등 깃발 제작과 판매를 하는 김진오(59)씨는 7일 아쉬움을 토로했다. 공휴일에 집 주변 인왕산을 자주 오르는 김씨는 몇 년 전부터 인근 아파트의 국기 게양의 변화를 느낀다고 했다. 태극기 게양 가구가 줄자 김씨의 매출도 덩달아 줄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단체 행사도 줄어 태극기는 물론 각종 깃발을 찾는 이들도 드물다고 한다.

김씨는 “국기 게양을 국가가 강제할 수 없지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주면 좋겠다”라면서 “반공·방첩 시대 같은 애국심을 고취하자는 게 아니다. 최소한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잊지 말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현충일에도 사라진 태극기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6회 현충일 추념식에 조기가 걸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6회 현충일 추념식에 조기가 걸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3·1절에 이어 6일 현충일에도 국기를 다는 가구는 찾기 어려웠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온·오프라인으로 태극기 판매를 하는 50대 중반 장모씨는 “2~3년 전부터 50% 이상 매출이 줄었고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60대 이상 어르신들은 그래도 태극기를 게양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태극기 수요 자체가 없어 이제는 중국산·국산 여부를 따지는 게 의미가 없다. 그 정도로 ‘태극기의 위기’다”고 했다. 태극기 생산 업체 관계자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태극기 부대’가 등장했을 때 ‘반짝 특수’ 이후로 태극기 수요가 급감했다”고 입을 모은다.

30대 직장인 장모씨는 “태극기 부대 이후 태극기는 ‘고집불통 노인’ 같은 이미지로 굳어졌다”면서도 “국기 게양이란 형식과 국민으로서 납세와 병역 등의 의무를 다하는 마음은 별개라고 본다”고 말했다.

7일 오후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장병들이 고인의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7일 오후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장병들이 고인의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형식보다 마음 중요” SNS서 국경일 기념

1인 가구가 늘어나며 집에 국기 게양대 자체가 없는 세대가 늘어난 것도 태극기 게양이 사라진 이유 중 하나다. 일부 젊은 층은 국기게양보다는 SNS에 기념 게시물을 올린다. 6일 인스타그램이나 가상 플랫폼 제페토에서는 현충일을 기념하는 여러 게시물이 올라왔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본, 중국과의 문제에서는 과거보다 민족주의적인 면을 보이면서도 태극기 게양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기르는 건 철 지난 전통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봤다. 그는 “일부 정치세력이 태극기를 정치적인 맥락에서 활용하고 독점해 젊은 층은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면서 “국기 게양에 집착하는 것보다 건전한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게 중요하다. 게양은 자발적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태극기는 임기 없다”

지난 2018년 故 박정희대통령 탄생 101돌을 맞아 박 전 대통령 생가앞에서 제90차 태극기집회를 연 대한애국당 당원과 보수단체 회원들이 '박정희 지우기 중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구미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뉴스1]

지난 2018년 故 박정희대통령 탄생 101돌을 맞아 박 전 대통령 생가앞에서 제90차 태극기집회를 연 대한애국당 당원과 보수단체 회원들이 '박정희 지우기 중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구미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뉴스1]

과거 정부가 국기 게양을 독려해 역효과가 난 적도 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2월 당시 행정자치부는 전 국민 태극기 달기 운동을 추진했다. 당시 일부 의원들이 민간 건물과 아파트 동별 출입구에 태극기 게양대를 만드는 법 개정안을 준비했다가 “시대착오적인 국가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국기홍보중앙회 이래원(77)대표는 “과거 군사 정권에서 태극기를 지나치게 강조한 부분, ‘태극기 부대’의 무질서함이 태극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만들어냈다. 내가 사는 800세대 아파트 단지에서 조기를 단 게 우리 집뿐이더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 대표는 “정권은 임기가 있지만, 태극기는 임기가 없다. 좌우 상관없이 태극기를 잘 기념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사회지도층이 솔선수범하고 정치를 잘하면 없던 애국심도 생기고 태극기를 자발적으로 게양하는 사람들도 많아지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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