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법 징용배상 판결은 "국제법 위반", 1심 판사가 깼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고 임정규 씨의 아들 임철호(가운데) 씨가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일본제철 주식회사와 닛산화학 등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각하된 뒤 법원을 나서며 취재진 질문을 받고 있다. 뉴시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고 임정규 씨의 아들 임철호(가운데) 씨가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일본제철 주식회사와 닛산화학 등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각하된 뒤 법원을 나서며 취재진 질문을 받고 있다. 뉴시스

‘김명수 대법원’이 인정했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하급심인 1심이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부장 김양호)는 7일 강제징용 피해자 송영호씨 등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니시마쓰건설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1억원씩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각하 판결했다. 각하는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해 본안 심리 없이 재판을 끝내는 것으로, 사실상의 원고 패소 판결이다. 2018년 10월 30일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했던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 판결을 2년8개월 만에 뒤집은 것이다.

법원, 일본기업 상대 손배소 각하 #“개인 청구권도 한일협정으로 해결 #국제법적으로는 대법 판결 잘못” #2018년 대법 전원합의체 판결 비판 #2심·대법으로 공 넘어가 혼란 예고

핵심은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한 해석 차이에 있었다. 한일협정은 제2조 1에서 ‘양 체약국(締約國) 및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규정하면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당시 “일제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따른 정신적 위자료에 관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한일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일협정은 미지급 임금 등 민사상 채무관계 해소를 위한 것이며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 청구 내지는 정신적 위자료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반면에 이날 1심 재판부는 “한일협정으로 강제징용 관련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도 해결된 것으로 봐야 한다”며 정반대의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해결’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등 한일협정 조문은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송으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관련기사

이어 “(조약법에 관한) 빈 협약에 따라 사법적 해석 등 국내 사정만으로 국제 조약에 해당하는 한일협정 불이행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며 “이는 국제법상 금반언(앞선 언동과 모순되는 언동을 할 수 없음) 원칙 위반”이라고 했다. 재판부는 “이에 따라 강제징용 문제는 배·보상까지 해결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한일협정으로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된 청구권에 해당한다”고 결론 내렸다.

대법도 놀랐다 “1심, 전원합의체 판결 정면으로 뒤집을 줄 예상 못해”

재판부는 한발 더 나아가 대법원 판결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식민지배와 징용의 불법성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국내법적인 법 해석이다. 일본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국제법적으로도 인정됐다는 자료가 없다”면서다.

또 “만약 일본의 병합이 강점에 불과했더라도 식민지배를 금지하는 국제법적 관행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일제의 식민지배가 불법인지 여부는 사법부가 아니라 정치적 기관이 해야 할 것으로, 사법 자제의 원리가 적용되는 영역”이라고도 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결국 피해자들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도 단지 국내 해석에 불과한 것으로, 이 같은 국내 사정만으로 국제조약에 해당하는 한일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일제 징용 피해자 일본 기업 상대 소송 주요 일지. 중앙일보

일제 징용 피해자 일본 기업 상대 소송 주요 일지. 중앙일보

재판부는 별도의 항목으로 일본 기업에 대한 강제집행의 위법성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재판부는 “만약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판결이 확정돼 강제집행이 이뤄지면, 국제법정에서 한국이 패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대법원의 판결이 국제재판의 대상이 되는 것만으로 사법 신뢰에 손상을 입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재판부 역시 일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미흡하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 및 국제법 존중이라는 또 다른 헌법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원고들의 헌법상 재판 청구권은 제한될 수 있다”며 “한일협정의 성격상 국가가 자금을 지급받은 이상 그 국민은 상대국 개인에 대해 소송으로 권리 행사를 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강제징용 문제에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한일협정으로 인해 소멸했느냐 여부는 2005년 정부가 민관공동위원회를 꾸렸을 때부터 쟁점이 됐다. 정부는 그간 두 측면의 인식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일종의 ‘그레이 존’에 머물러왔다.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그린 라이트’로 명시한 것은 2018년 대법원 판결이 처음이었다.

이날 판결은 기습작전처럼 이뤄졌다. 재판부는 선고 기일을 당초 10일로 공지했다가 이날 오전 9시 “오늘 오후 2시로 변경됐다”고 통지했다. 재판부는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판결 선고를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원고들의 반발 등을 예상해 기습적으로 선고 날을 변경한 셈이다.

대법원에서도 “놀랍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정면으로 뒤집는 판결이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법원조차 이런 판결이 나올지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날 판결에 대해 원고들은 강하게 반발하면서 항소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 사안에 대해 2심과 대법원이 재차 판단을 내릴 때까지 당분간 법적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유정·박현주 기자 uuu@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