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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된 한·일 간 ‘외교의 시간’…文 정부의 선택은

중앙일보

입력

강제징용 피해자의 유족 임철호(왼쪽)씨와 장덕환 대일민간청구권 소송단 대표가 7일 1심 선고에서 각하 판결을 받은 뒤 기자회견에 나선 모습. 이날 선고 공판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낼 권한이 없다며 각하 판결을 내렸다. 각하란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내리는 결정이다. [뉴스1]

강제징용 피해자의 유족 임철호(왼쪽)씨와 장덕환 대일민간청구권 소송단 대표가 7일 1심 선고에서 각하 판결을 받은 뒤 기자회견에 나선 모습. 이날 선고 공판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낼 권한이 없다며 각하 판결을 내렸다. 각하란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내리는 결정이다. [뉴스1]

7일 법원이 일본 전범기업에 강제 징용 피해에 대한 손해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결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임기 내 한ㆍ일 관계 개선을 위한 사실상 마지막 실마리를 잡게 됐다. 동시에 일본과의 화해와 징용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 실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그간 정부는 사법부 판단 존중과 일본과의 관계 개선 노력이 상충하는 구조적 모순에 빠져 있었다.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면 2018년 대법원 판단에 따라 일본 전범 기업 자산 현금화 등 강제집행을 통해 피해자들이 배상받는 게 순리인데, 이럴 경우 한ㆍ일 관계는 회복 불가의 지경으로 떨어질 게 불보듯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나서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금전 보상을 할 수도 없었다. 대법이 판결을 통해 배상의 주체를 ‘일본 전범 기업’으로 못박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판결로 정부로선 존중해야 할 또다른 사법부의 판단이 생겼다. 대법원 판결과는 상반되게 일본 기업에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 없고, 강제집행 또한 권리 남용이라 허용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정부로선 대법 판결에만 묶이기보다는, 움직일 수 있는 외교적 공간이 다소 확장된 셈이다.

"소송 불가하지만 청구권은 유효" 

여기서 또다른 핵심은 법원이 이날 판결에서 피해자들의 소송을 각하하면서도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되거나 포기되지 않았다”고 판시한 점이다. 1965년 한ㆍ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일본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것 뿐이지, 손해배상 청구권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취지다.  

해당 전제가 유지돼야 주체가 어디가 됐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금전적으로 보상이나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특히 재판부는 2018년 대법 판결 당시 다수 의견에 반대했던 권순일ㆍ조재연 대법관의 의견과 결론적으로 같은 입장을 취했다. 당시 두 대법관도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지만,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제한된다고 밝혔다.

1965년 한ㆍ일 청구권 협정 체결 당시 한국은 일본과 일괄처리협정(lump sum agreement, 전후 배상 문제 등과 관련해 국가가 외교적 교섭을 통해 자국민의 재산이나 이익에 대한 사항을 국가 간 조약으로 일괄해결하는 것)을 맺었다는 이유였다. 이에 더해 두 재판관은 “청구권 협정으로 인해 개인이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게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지금이라도 국가가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에 공 넘긴 법원  

018년 10월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사진은 당시 대법원 대법정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 선고를 위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018년 10월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사진은 당시 대법원 대법정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 선고를 위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이날 판결은 두 재판관의 당시 소수 의견과 대부분 궤를 같이 하면서도 국가가 보상하라는 부분은 판결문에 포함하지 않았다. 열린 답변의 형식으로 온전히 정부에 공을 넘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 관건은 한ㆍ일 관계 개선은 물론 고령의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을 의미 있게 지원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와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다. 더 이상은 사법부 판결만 핑계로 댈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그간 일본은 한국 정부가 무대응으로 일관하다 사법부에 과거사 문제를 미뤄서 이 지경이 됐다는 불만이 있었는데, 이번 판결을 활용한다면 정부가 행정부나 입법부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는 신호를 발신하는 것이 가능해진 셈”이라며 “이제 과거사 문제를 풀려는 정부의 정치적 의지에 모든 것이 달렸다”고 말했다. 또 “이번 판결에서 ‘소송 제기 제한되지만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있다’고 판단한 것은, 행정조치나 입법조치로는 여전히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가 가능하다는 뜻”이라며 “정부가 공을 넘겨받은 만큼 가능한 방안을 마련해 피해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신중한 입장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판결 직후 “관련 동향은 주시하고 있다”며 “정부는 앞으로도 사법판결과 피해자 권리를 존중하고, 한일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양국 정부와 모든 당사자가 수용 가능한 합리적 해결방안을 논의하는 데 대해 열린 입장으로 일본 측과 관련 협의를 지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방안을 찾겠다는 취지인데, 의지와 역량이 부족하다면 오히려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일각에서는 도쿄 올림픽에 북한 불참이 기정사실화하며 문재인 정부의 한ㆍ일 관계 개선 의지가 다소 떨어진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사법부의 판단에 대해 청와대가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도 “도쿄 평화 프로젝트 폐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힘든 상황인데, 이런 법원의 판단 등 복잡한 사안이 발생한 것이라 상황을 면밀히 봐야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지혜ㆍ강태화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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