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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하의 시시각각

이준석 신드롬, MZ세대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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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딱 한 달 전만해도 국민의힘 대표 경선에서 1985년생 이준석 후보가 태풍의 눈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인도 이 정도일 줄 몰랐다고 한다. 예비경선 결과 이 후보는 일반 여론조사에서 51%의 지지율로 2위 나경원 후보(26%)를 크게 따돌렸고, 당원 조사에서도 31%(나경원 32%)로 만만찮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국민의힘 당원들의 주류는 보수 색채가 뚜렷한 ‘50대 이상’과 ‘영남권’이다. 거기서 당 대표감으로 36세 후보가 먹힌다는 건 사실 좀 충격적이다. 본 경선(6월11일)은 당심 비율이 70%(예비경선은 50%)로 높아지지만 이런 추세면 36세의 제1 야당 대표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꽤 있다. 설령 이 후보가 낙선하더라도 여당까지 긴장한다는 ‘이준석 현상’을 일으킨 것 만으로 경선의 진정한 주인공이 된거나 마찬가지다.

보수도 전략적 사고 가동 시작해 #MZ세대서 ‘멀쩡한 보수’ 첫 등장 #진보에도 진화의 촉매제로 작용

지난달 30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 호남·제주 합동연설회에서 이준석 후보가 정견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0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 호남·제주 합동연설회에서 이준석 후보가 정견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우선 ‘이준석 현상’은 보수 진영도 전략적 사고를 가동하기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눈길을 끈다. 누구 말처럼 국민의힘은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동네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선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체면ㆍ전통 따위는 얼마든지 내던지겠다는 분위기다. 민주당은 지지 기반이 호남이지만 지난 20년간 영남 출신을 세번이나 대선 후보로 내세웠다. 진보층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다. 이제 보수도 그런 정치공학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50대 이상에선 우위가 확실하니 2030세대의 표를 조금이라도 더 끌어올 수 있는 젊은 대표가 낫다는 계산이다. 정권교체를 위해서라면 이 후보의 튀는 언행쯤은 얼마든지 참아주겠단 것이다.

이 후보 같은 ‘0선 정치인’들의 급부상도 주목할 부분이다. 대선 레이스에서 선두를 다투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국회의원 경험이 없다. 심지어 윤 전 총장은 출마 경력 자체가 없다. 예전 같으면 대선후보 엔트리에 끼지도 못했겠지만 오히려 이젠 0선이 주류다. 국회의원 오래한 게 불명예가 된 세상이다. 수십년간 여당은 청와대의 거수기 노릇만 하고,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에만 매몰되면서 국회 스스로 자신의 위상을 줄기차게 망가뜨린 결과다. 국회 선수(選數)가 정치력ㆍ경륜의 반영이 아니라, 권력욕의 척도로만 비춰지니 차라리 0선이 환호를 받는다.

3일 국민의힘 대구·경북 합동연설회에서 이준석 후보(맨 왼쪽)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겠지만, 국가가 통치불능 상태에 빠졌기에 탄핵은 정당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후보 오른쪽으로 조경태, 나경원, 주호영, 홍문표 후보. [연합뉴스]

3일 국민의힘 대구·경북 합동연설회에서 이준석 후보(맨 왼쪽)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겠지만, 국가가 통치불능 상태에 빠졌기에 탄핵은 정당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후보 오른쪽으로 조경태, 나경원, 주호영, 홍문표 후보. [연합뉴스]

보다 근본적으로 ‘이준석 현상’은 MZ세대가 본격적으로 제도 정치권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란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비관주의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세대다. 미래가 불투명한 이들에게 국가와 민족 같은 얘기는 공허하다. 당장의 본인 이해관계가 중요하다.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라는 건 헛소리다. 온전히 개인의 능력만으로 평가받는 게 공정이자 정의다. 무임승차는 용납못한다. 성별이 우대 근거가 될 순 없다. 이같은 MZ세대의 가치관은 자연스럽게 생활형 보수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보수 진영의 이념은 1세대 반공 보수와 2세대 시장 보수에서 발전이 멈춰있었다. 전자는 군사독재, 후자는 재벌이라는 태생적 약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MZ세대에게 그런 트라우마는 없다. 우석훈 성결대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멀쩡한 보수”가 처음으로 등장한 셈이다.

지난달 초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이 후보의 '반페미니즘' 성향을 비판하자 곧바로 이 후보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반박글. [페이스북 캡처]

지난달 초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이 후보의 '반페미니즘' 성향을 비판하자 곧바로 이 후보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반박글. [페이스북 캡처]

이 후보는 MZ세대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노골적일만큼 잘 대변하고 있다. 그동안 정치권의 성역이었던 여성할당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액셀을 할 줄 아는 사람만 공천을 주자고 한다. MZ세대가 이 후보에게 열광하는 이유다. 하지만 MZ세대가 언제나 국민의힘 편이란 법은 없다. MZ세대가 여당 386세대의 내로남불에 염증을 느끼고 4월 재ㆍ보선에서 야당을 밀어줬지만, 특정 정당에 집착하지 않는 게 MZ세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머잖아 민주당에서도 ‘이준석’이 나올지 모른다. 아직 80년대 이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진보 진영에게도 MZ세대는 진화의 촉매제가 될 것이다. 한국 정치에 새로운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정치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