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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명림의 퍼스펙티브

한국의 보편·가치 외교 도약은 진보·보수 협력 있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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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한국 외교 4.0 시대의 과제

박명림 퍼스펙티브

박명림 퍼스펙티브

외교는 한국의 생존과 발전의 제일 요인이었다. 한국 문제는 늘 세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세계가 몰려드는 길목이고 세계를 향한 창문이다. 그곳에서의 평화가 동아시아의 평화였고, 그곳의 전란은 동아시아 전란을 의미했다. 한번 평화가 오면 유례가 드문 장기 평화를 누렸고, 반면 전쟁이 시작되면 대참화가 되고 말았다.

한·미 정상회담 통해 외교의 범위가 한반도에서 전 세계 포괄 #이제 인류 보편적 가치와 의제에 기반을 둔 보편 외교 절실 #내부 진영 대결과 일방 독주 지속하면 보편·가치 외교 불가능 #초당적 외교 지속할 수 있게 정책 연속 가능한 제도 만들어야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문명과 제국들은 이곳을 넘어야 서로를 찌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대륙과 해양의 끝이요 시작이었다. 대륙도 거기에서 멎고 시작되며, 바다도 거기에서 시작되고 멎는다. 그리하여 오래도록 한국인들은 지정학을 활용하는 지혜, 즉 외교에서 발군이었다. 고구려건 신라건 백제건 고려건 조선이건 한번 건립되면 초장기 국가 수명을 구가하였다. 한국 국가들의 평균 국가 수명은 중국은 물론 세계 어떤 사례보다 길다.

그것은 한·중·일 동아시아 국가들의 영토와 국경, 주권과 국가, 문화와 언어의 장기적 독자성과 독특성, 그리고 이들 간 국제질서의 위계와 균형, 끝으로 한국인들의 높은 정치적·문화적 주체성이 결합한 산물이었다. 600년을 지속한 국가 제도를 정초한 정도전의 예에서 보듯 그들은 ‘국가·국호·국세·우리나라’라는 의식이 근대국가 등장 이전부터도 아주 선명하였다.

한국은 질서 격변기에 전란 휩싸여

그러나 질서 격변기에 한국은 늘 전란에 휩쓸리고 말았다. 고구려·당나라 전쟁도, 동아시아 7년 전쟁(임진왜란)도, 청·일전쟁도,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동아시아가 서구와 조우한 이후 한국전쟁 종식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은 장기 전란의 시대에 들어서고 말았다. 서양과의 충돌 이래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전쟁(안중근의 표현),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전쟁까지 그들은 전란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전쟁 종식 이후에야 이 희생들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동아시아와 한국을 두고 쟁투했던 전통 중화체제, 일본 군국주의, 소련 공산주의로부터 모두 벗어나 그들을 대체할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진입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한국민들은 그 고난을 통해 (중국)유교주의와 (일본)군국주의와 (소련)공산주의 대신 (서구)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였다.

이승만의 일대 승부수였던 전후 한미상호방위조약과 1954년 ‘전후 헌법’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줬다. 48년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도입에 이어, 한국전쟁을 계기로 현대 한국의 안보 질서와 경제체제가 정초된 것이었다.

먼저 48년 건국 헌법의 “광물·중요 지하자원·수력·자연력의 국유”(제85조), “운수·통신·금융·보험·전기·수도·가스 부문에 대한 국영 또는 공영”(제87 1항), “무역의 국가통제”(87조 2항) “국방상 국민생활상 긴절한 필요에 의한 사영 기업의 국유 또는 공유로의 이전”(88조) 조항들은 1954년 전부 폐지·완화·수정되었다. 국가 경제의 원칙이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자유 시장경제로 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변경은 한국을 시장경제체제로 만들기 위한 미국의 집요한 압력 때문이었다.

한국은 이제 선도·생태·문명 외교로

한미상호방위 조약은 더 극적이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한국은 ‘공산 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자유 한국’의 방어를 넘어, 오래 괴롭혀온 중국·소련(러시아)·일본을 모두 제어하는 국제적 안전판을 확보하였다. 이는 미국이 아시아 대륙 국가와 맺은 최초의 안보 동맹일 정도로 한국의 쾌거였다. 한·미 동맹은 국가 기틀을 정초한 한국 외교 1.0이었다. 생존 외교, 동맹 외교, 안보 외교, 원조 외교, 발전 외교가 1.0 외교의 내용이었다.

조약의 가장 주목되는 내용은 일체 분쟁의 평화적 수단에 의한 해결과, 유엔의 목적을 준수하여 무력 위협과 무력행사의 자제를 약속한 제1조였다. 전쟁 피해국으로서는 충격적인 평화 조항으로서 무력 사용을 배제한 평화 국가로의 비약 구상이었다. 한반도를 안정시키려는 미국의 의지였고, 선제 도발을 자제하려는 한국의 확인이었다.

한국 외교의 2.0은 노태우 시기 한·중-한·소 수교였다. 냉전 해체와 함께 한국은 자유 진영을 넘어 공산 진영과도 외교 관계를 맺는 전방위 외교 시대로 진입하였다. 전방위 외교는 근대 이래 최초일 만큼 한국 국제 관계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국제질서 격변에의 첫 전쟁 없는 적응이었다. 이후 한·중 경제 관계의 폭발적 성장을 통해 교역·수출·수입·무역수지·의존도 모두 최고 수준을 기록하였다는 점은, 한·미 동맹처럼, 외교가 경제의 견인차였음을 보여준다.

노무현의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은 한국 외교 3.0 단계였다. 오랜 원조의 주체 미국과 맺은 자유무역협정은 국력 성장에 기반을 둔 한국인들의 자신감에 따른 성취였다. 이후 무역 이익이 보여주듯 이는 한·미 관계에서의 안보와 경제, 그리고 한국의 미국과 중국 사이의 위치, 두 측면 모두에서 재균형의 회복, 즉 중견국 외교의 성과였다.

한국 발전의 한 토대는 외교

이번 문재인-바이든 정상회담의 합의 범위와 내용은 한국 외교 4.0으로 불릴 만큼 획기적이다. 한·미 간 ‘포괄적 글로벌 동맹’에 기초해 이제 한국 외교가 선도 외교, 포괄 외교, 보편 외교, 생태·환경 외교, 가치 외교, 문명 외교로 진입하고 있다.

우선 구체적 논의와 합의의 범위 자체가 한반도 현안은 물론 동북아를 넘어 세계 차원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기존 정상회담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북한, 남북 관계, 한반도 비핵화, 미사일 주권 회복, 한·미 관계, 한·미·일 협력은 물론 대만해협, 남중국해, 아세안, 미얀마, 메콩 지역, 태평양 도서국들, 중앙아메리카 문제까지 포괄한다.

둘째, 의제의 영역이다. 두 정상은 두 나라와 세계의 거의 전 주요 분야를 망라하였다. 셋째는 민주주의, 인권과 법치, 기후 문제, 온실가스, 감염병, 백신, 원자력, 국제질서, 국제 보건, 기술 의제에 이르기까지 세계와 인류의 보편 의제와 가치에 대한 합의였다. 가장 놀라운 지점이다. 한국은 더는 작고 특수하지 않은 것이다.

넷째, 한국의 역할이다. 두 정상은 한국 문제는 물론 보편 의제와 가치에서도 한국의 적극적인, 때로는 선도적인 역할을 인정·주문·합의하였다. 특히 반도체를 포함한 주요 기술 문제에 관한 한 해외 투자와 핵심 기술 수출 통제에 합의할 정도로 한국의 선도성을 인정한다. 한국의 기술 발전이 없었다면 상상도 못 할 만한, 의도를 숨긴 합의였다.

앞서 한국은 국력에 걸맞은 약소국 외교, 중진국 외교, 중견국 외교를 차례대로 추구하고 실현하였다. 각각 동맹, 전방위, 균형 외교로 표현되는 그것들은 크게 성공적이었다. 한국 발전의 한 토대는 명백히 외교였다. 이제 인류 보편적 가치와 의제에 기반을 둔 보편 외교가 절실한 때다.

세계와 함께 가려면 국내서 함께 가야

가장 먼저 대외 외교의 대내 기반 마련이 필요하다. 안이 밖이고 내치가 외교다. 내부 진영 대결과 독임을 지속한다면 보편과 가치 외교는 불가능하다. 내부 통합을 말한다. 세계와 함께 가려면 먼저 안에서 함께 가야 한다. 문재인과 한국 사회가 명심할 필수 과제다.

둘째, 보편 가치와 글로벌 선도 역할을 남북 관계가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역(逆) 할슈타인원칙에 가까울 정도로 무원칙한 저자세로 일관한 기존 대북 정책을 지속해서는 한국 외교 4.0은 착근하기 어렵다.

셋째, 생명과 보건, 기술과 표준, 생태와 문명의 보편성과 선도성을 발양하고 고양하기 위한 국제 기준의 내부 충족과 민간 영역 자율성의 존중이다. 이 두 중대 요인이 결여된다면 생명과 기술과 문명의 장기 융성과 표준은 언감생심이다.

끝으로 초당적 외교를 지속할 수 있도록 정책 연속이 가능한 국가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국정의 연속성 없이 국내-한반도-세계 문제에서 자유와 인권, 평등과 개방, 민주와 평화의 가치를 계속 담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 외교 4.0의 합의가 합의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제 안을 다지자. 안이 부실하다면 밖은 언제든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