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손님으로 북적였던 어릴 적 한옥집, 그 이유가 있었네

중앙일보

입력 2021.06.06 11:00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94)  

방역지침에 따라 추석과 설날은 건너뛰었지만, 가족 모임이 8명까지 허용되고 어머니도 백신을 맞았기에 근 1년 만에 가족이 모여 즐겁게 지냈다. 가족이 함께하는 게 이렇게 평화롭고 행복한 일인지 새삼 느낀다. 술과 음식을 나누며 대화는 자연스레 옛이야기로 흘러갔는데, 우리가 클 때 집에 손님이 아주 많이 찾아와 어머니께서 고생하신 게 화제가 되었다.

우리 집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의 대지 35평짜리 아담한 한옥이었는데, 세월 따라 개량하고 수리해서 방이 다섯 개나 되었다. 우리 가족 다섯은 안방과 대청, 건넌방을 쓰고, 문간방과 마당 건너 별채는 전세나 월세를 놓았다.

아직도 흔적이 남아있는 서울 용두동의 한옥단지. 1930년대에 조성되었고 대부분 30~40평대이다. 방마다 세를 놓고 살면서 가끔 손님맞이까지 하곤 했으니 어떻게 다 감당했는지 신기하다. [사진 박헌정]

아직도 흔적이 남아있는 서울 용두동의 한옥단지. 1930년대에 조성되었고 대부분 30~40평대이다. 방마다 세를 놓고 살면서 가끔 손님맞이까지 하곤 했으니 어떻게 다 감당했는지 신기하다. [사진 박헌정]

집주인과 세입자는 죽만 맞으면 친척이나 동기간 이상의 관계로 지내곤 했다. 새댁들은 아이 재워놓고 걱정 없이 시장에 다녀올 수 있었고, 낮에 큰 양푼에 열무김치와 밥을 비비면 여러 집 점심이 단번에 해결됐고, 남자들 없는 깜깜한 여름밤에 여자들은 대문 걸어 잠그고 마당에서 함께 목욕도 했다. 심하다 싶은 부부싸움은 연장자가 나서서 말려주었다. 내가 어려서인지, 좁은 집에 많은 사람이 살았어도 불편하던 기억보다 재미있던 추억이 더 많다.

그런데 손님이 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시골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워낙 많았다. 할아버지 형제가 5남매, 아버지 형제가 6남매였고 우리가 일찌감치 서울에 올라와서 자리 잡아 손님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일가뿐 아니라 친척의 지인, 마을 사람, 심지어 그 친척까지 소개받고 찾아왔으니, 이를테면 게스트하우스인 셈이었다. 가끔 손님이 가신 후 아버지께 누구냐고 여쭤보면 “그게 그러니까…” 하며 헷갈릴 때도 있었다.

우리 집안은 가진 것에 비해 잘 베풀고 사는 편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이긴 하지만 가장 넉넉한 집이었고, 동네 원로 격인 할아버지는 술·이야기·사람을 좋아하는 원조 ‘한량’인 데다 서울 중앙관청에서 일하던 아들 자랑을 사방에 해댔을 터이다.

마을 사람들이 보내오는 존경의 이면에는 늘 무형의 ‘청구서’가 따라다닌 듯하다. 마을에 지나가는 사람이 하룻밤 자고 갈 수 없냐고 물으면 다들 우리 할아버지 댁을 가리켰으니, 내가 어릴 때 잠깐씩 가보면 고모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밥을 어지간히 해서 먹이고 재워 보내던 기억이 난다.

집안에 어른을 모시고 살면 명절이나 생신 때 마치 큰 대회를 치르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나의 외가댁. [사진 박헌정]

집안에 어른을 모시고 살면 명절이나 생신 때 마치 큰 대회를 치르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나의 외가댁. [사진 박헌정]

원체 그런 문화라 집에 누가 찾아와도 별 거부감은 없지만, 문제는 ‘공간’이었다. 일단 방이 문제다. 안방에서는 부모님과 내가, 건넌방에서는 두 형이 지내다가 손님이 오면 비상계획이 작동한다. 손님은 기본이 하루였고, 고모들처럼 가까운 친척은 가족 단위로 와서 사나흘 이상 머물렀다.

때로는 각지에서 우리 집을 거점으로 모이기도 한다. 고모들이 “오빠 집에서 만나자”, 또는 고모할머니들이 “조카 집에서 만나자”라고 하면, 그때부터는 방 배정이고 뭐고 없이 사촌들과 뒤섞여 지내게 된다. 식사 때 안방에는 둥근 상이 기본 두 개였고, 마당 수돗가에선 늘 누군가 씻고 있었다. 화장실 문제는 어찌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세입자까지 합치면 20명 정도가 한 공간에서 생활한 것이다.

그래서 요즘도 어떤 좁은 공간에 들어가면 “괜찮아. 이 정도면 열 명도 잘 수 있어” 하는 말이 반사적으로 나온다.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아주 절박한 문제였다. 그 불편을 처음 호소하는 것은 늘 작은형이었다. 이틀째부터 엄마한테 “언제 가신대?” 하며 계속 볼멘소리를 하니 밥해대기에도 지치는 어머니로서는 양쪽으로 힘들었을 법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집으로 모여들던 손님의 상황이 이해된다. 당시 시골에서 서울에 볼일이 있어 큰맘 먹고 출발하면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오후 늦게야 도착하니 저물어가는 낯선 대처에서 여관(요즘처럼 흔치도 않았다)에 찾아갈 엄두도 나지 않고, 누군가 보호자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요즘 해외 자유여행을 가는 사람이 첫날에는 한인 민박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형님(아버지)댁’에 들러 인사드리고 하룻밤 머물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듣고 마음을 다잡은 후 이튿날 아침을 든든히 얻어먹고 볼일 보러 가는 것이다. 주로 취직자리였다. 쉽게 떠나지 않던 친척도 그럴만했다. 서울 구경은 일생에 다시는 없을 것 같은 설레는 이벤트이자 큰 즐거움이다. 농사가 덜 바쁠 때 올라와서 몇 날 며칠 머물며 지하철 타고 인천 연안부두에도 가보고 천천히 창경궁(그때는 동물원이 있었다), 남산 같은 곳까지 둘러봐야 두고두고 동네에 자랑할 일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일가친척 간에 정이 더 살갑고 애틋하던 시대였는데 자동차, 카톡, 인터넷도 없이 서로 차단된 채 몇 년씩 훌쩍 가곤 했으니 한자리에 모이면 그동안 소식을 비롯해 나눌 이야기가 좀 많았을까. “누구 양반 돌아가셨다, 누가 누구와 결혼해 누구랑 누가 사돈이 되었고….” 좁은 방에서 아이들 재워놓고 밤새 이야기 나누던 게 기억난다.

교통이 불편하던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은 쉽게 올라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렵게 시간 내서 한번 오면 남산, 창경궁 같은 곳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내려가곤 했다. [사진 박헌정]

교통이 불편하던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은 쉽게 올라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렵게 시간 내서 한번 오면 남산, 창경궁 같은 곳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내려가곤 했다. [사진 박헌정]

요즘은 남의 집을 방문하는 문화가 거의 사라지고 곳곳에 편리한 숙박 시설도 많으니 잠자리를 신세 지는 일이 드물다. 한밤중이라도 자기 차 몰고 돌아오면 된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고 예전 것이 소멸해도 그 시절의 아련한 향기는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다. 며칠 전에 마당에서 제비 두 마리가 줄기차게 울어 가만히 봤더니 처마 아래 집을 지으려고 살피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 녀석들의 선택을 받고 싶어 소리도 죽이고 걸음도 조심조심했다.

코로나로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살았더니 집에 찾아든 제비도 반갑고 어느 아침에 불쑥 고개 내민 꽃봉오리도 반가울 정도다. 그러니 비좁은 집이 손님들로 북적거리던 그 시절이 꿈인가 싶게 그리워질 만도 하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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