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화물차 끌고 과일 장수로 생계 잇던 삼십 대 어느 겨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53)

성공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목적한 바를 이룸’이라고 쓰여 있다. 지금 잠시 당신 인생에서 ‘그것은 나의 첫 번째 성공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을 떠올려보자. 목적한 바를 이뤘다고 느낀 그 날의 기억. 성공이라는 바구니에 넣을 품목들은 사람에 따라 그 종류와 스케일과 용량이 무지 다양할 것임을 안다. 어떤 이는 십 대나 청년 시절에 했던 성공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장년이 되어 첫 성공을 맛보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면 중년에 첫 성공을 맛본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성공이라는 잣대 또한 천인 천색일 것이다. 거기에는 매우 작고 사소한 꿈이나 목표를 이룬 것도 포함될 테다. 또는 거대한 사업 확장이나 엄청난 단위의 계약 건이 성사된 순간일 수도 있다.이 글을 읽는 누구는 거액의 건물을 갖게 된 과거 그날을 떠올릴 것이다. 성공이라는 낱말에 담을 수 있는 우리 각자의 기억은 질량도 무게도 매우 다양하다. 어느 것이 완벽한 성공이고 어느 것이 절반의 성공일까? 이것은 가늠하기조차 매우 주관적이다.

이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성공(그러나 내겐 분명 첫 번째 성공이다)의 순간이 내게 있다. 세상이 눈부시게 변하고 시간이 아무리 가도 내 안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성공사례가 있다.

“아! 드디어 내가 해냈구나! 성공했구나! 대단하다!”

이런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다. 그것은 지금 돌아봐도 내 삶에서 첫 번째 성공이 분명했다.

과일장사를 하던 시절 경매에서 괜찮게 과일을 사면 마치 전장으로 나서는 병사처럼 마음이 비장해졌다. [사진 pixabay]

과일장사를 하던 시절 경매에서 괜찮게 과일을 사면 마치 전장으로 나서는 병사처럼 마음이 비장해졌다. [사진 pixabay]

삼십 대 중반 어느 겨울이었다. 화물차를 끌고 과일 장사를 다닌 지 몇 달이 지나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겨울이 왔고 나는 새벽 일찍 직산 농수산물센터에 가서 여느 날처럼 경매물건을 빙 돌아봤다. 어제까지는 과일 종류를 다양하게 구색을 갖춰 팔았는데 그날은 귤 경매가가 제법 괜찮게 나왔다. 이번엔 귤 한 가지만 단품으로 한번 실어볼까? 결정한 나는 단품으로 박스째 팔아넘길 귤을 화물차 천장에 닿을 정도로 가득 싣고 고무바로 야무지게 묶었다. 시동을 걸고 집으로 출발하는데 차의 무게가 엄청났다. 이때의 기분은 전장으로 나서는 병사 같다. 이걸 다 어디 가서 팔아야 하나 하는 막막함과 어떤 일이 있어도 시일 안에 팔지 않으면 적자라는 절박함.

서둘러 아침을 해결하고 마당에 세워놓은 화물차로 나갔다. 화물차에 씌운 주황색 천막 높이까지 물건이 가득했다. 고무바로 꽁꽁 묶인 채 얌전히 내 손길을 기다리는 귤 박스들. 박스 표면은 온통 미각을 자극할 오렌지빛 디자인 이 가득해 보기만 해도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멀리서 보면 한겨울에 만나는 주황색 꽃밭이다. 그날그날 판매하기 편리하도록 과일 박스별로 재정리가 필수였다. 그러려면 물건을 모두 마당으로 내린 후 귤의 크기별로 바로바로 찾아 팔기 쉽도록 다시 쌓아야 했다. 작업하기 위해 손에 고무 코팅된 목장갑을 단단히 꼈다. 잠시라도 장갑을 끼지 않으면 날카로운 박스 모서리와 예리한 밴딩 끈에 손톱이 수없이 부러지고 피부가 찢겨 엉망이 되었다. 나는 화물차 뒷바퀴를 밟고서 겅중, 단숨에 적재함 위로 올라갔다.

어제까지 팔다 남은 과일은 먼저 팔기 위해 적재함 한쪽에 따로 놓았다. 빈 박스들은 적재함 위에서 분리하고 뜯고 펼치고 발로 밟아 마당으로 던졌다. 마당 한켠엔 그동안 모아온 폐지는 이미 화물차 한 대 분량이나 쌓여 있었다. 이것들은 내가 장사를 쉬는 날 한꺼번에 차에 싣고 가 고물상에 팔았다. 그러면 나의 일곱 살 딸과 열두 살 아들에게 먹일 양념치킨 값이 내 손에 쥐어지곤 했는데 그 기분도 꽤나 쏠쏠했다. 아침마다 하는 적재함 위의 선별작업은 오전 8시경 시작해 9시쯤, 늦으면 10시쯤이면 끝이 난다. 그 일은 겨울에도 후줄근하게 땀이 난다. 지금은 20kg 귤 박스가 거의 사라졌지만 그때는 제법 많았다. 20kg, 10kg 무게의 귤 박스 150여 개를 여자인 나 혼자 올리고 내리고 들고 나르고 쌓고 고무바 당겨서 묶고 하다 보면 영하의 추위에도 등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트럭에서 귤 몇 개를 꺼내 한입 깨물었더니 알알이 터지면서 오래 잊고 산 어느 날의 내 기억이 떠올랐다. [사진 pxhere]

트럭에서 귤 몇 개를 꺼내 한입 깨물었더니 알알이 터지면서 오래 잊고 산 어느 날의 내 기억이 떠올랐다. [사진 pxhere]

작업을 마치고 지친 숨을 고르며 차에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적재함 둘레를 천천히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고무바는 튼튼하고 안전하게 잘 묶였는지 세게 당겨보았다. 단단했다. 운전하다 바가 풀리면 브레이크를 밟거나 모퉁이를 돌 때 박스가 도로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 또한 혹시 삐져나온 박스가 있다면 운전할 때 백미러를 가려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항상 출발 전 안전점검이 필수였다. 적재함 가득 실린 주황색 귤 박스를 막 떠오른 아침 태양이 무대처럼 조명을 비췄다. 실로 눈부셨다. 땀을 너무 흘렸는지 갑자기 심한 갈증이 몰려왔다. 적재함에 걸터앉아 오늘 새로 산 싱싱한 박스를 열고 귤 몇 개를 꺼냈다. 껍질을 까고 귤 한쪽을 입에 넣었다. 순간 상큼한 귤 알갱이가 톡톡 터졌다. 바로 그때, 오래 잊고 산 어느 날의 내 기억도 함께 알알이 터져 뇌리에 확 떠올랐다.

아홉 살 때였다. 나는 양평군 용문면 다문리에 살았다. 겨울이었고 오후쯤이었다. 아버지는 그날도 외상술 마시러 개성집이라는 유곽으로 사라졌다. 오빠는 친구들과 놀러 나가고 집에 나 혼자였다. 배가 고픈데 아무리 집을 뒤져도 먹을 게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갔고 개울 건너편 드넓은 쓰레기장을 걸었다. 그 당시 영하 35도, 40도는 기본인, 춥기로 악명 높았던 양평의 겨울이었다. 황량한 칼바람에 부서진 연탄재가 회오리처럼 날아다녔다. 이따금 깔깔한 잿가루가 눈에 들어와 눈알이 쓰리고 따가웠다. 손등으로 아픈 눈을 비비다가 발아래서 뭔가를 발견했다.(다음화에 계속)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