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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의 상징 교장 구령대, 아이들 놀이터로 파격 변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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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9호 26면

한은화의 공간탐구 생활

서울 동대문구 동답초등학교에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위한 구령대(口令臺)가 없다. 운동장에 도열한 아이들 앞에서 교장 선생님이 “끝으로~”라고 끝없이 훈시하는 조례가 없어진 지 오래다. 동답초는 4년 전 이 구령대를 놀이터로 리모델링했다. 권위의 상징물과도 다름없던 구령대가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됐다. 구시대의 틀을 깬 파격적인 공간 변화이지만 놀이터의 위치만으로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통상적으로 학교 놀이터의 위치는 교실에서 가장 먼 곳, 운동장 건너편이다.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멀찍이 떨어뜨려 놨다.

동답초, 구시대 틀 깬 리모델링 #교실과 가까운 위치 ‘휴식 공간’ #배봉초, 학교 가는 길 경사 심해 #놀며 가게 언덕에 놀이터 만들어

그런데 동답초의 새 놀이터는 구령대를 리모델링해서 교실과 아주 가깝다. 이를 디자인한 지정우·서민우 건축가(이유에스플러스건축 공동대표)는 “기존 단상의 높이가 단층 공간만 경험하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복층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놀이터의 토대가 됐다”고 전했다. 구령대 위에 다락방 같은 트리 하우스를 하나 더 올리고 진입 동선을 층층이 다양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옛 구령대를 넘나들며 트리 하우스를 향해 계단과 경사로를 자유롭게 오른다. 미끄럼틀도 없는 놀이터지만, 아이들은 곧장 새로운 놀이방법을 만들었다.

아이들 어디서든 놀 공간 만들어야

1, 2 놀이터로 리모델링한 구령대. 동답초의 구령대 놀이터에는 미끄럼틀이 없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개발해 잘 논다. [사진 진효숙]

1, 2 놀이터로 리모델링한 구령대. 동답초의 구령대 놀이터에는 미끄럼틀이 없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개발해 잘 논다. [사진 진효숙]

맞춤 제작한, 더군다나 건축가가 짓는 놀이터라니 생소하다. 지금까지 놀이터는 대량 생산된 놀이기구 위주로 공급됐던 터다. 놀이터의 역사가 짧기도 하다. 1·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서구의 도시에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됐다. 도시가 복구되고 대량으로 주택이 공급되면서 놀이터 역시 규격화되기 시작했다. 놀이터 하면 떠오르는 세트가 이때 굳혀졌다. 흔히 ‘3S’라고 불리는데 미끄럼틀(Slide), 그네(Swing), 시소(Seesaw)를 뜻한다. 이게 일본을 거쳐 1970년대 한국에 정착했다.

획일적인 기구 중심의 국내 놀이터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2015년께다. 어린이 놀이시설 안전 관리법이 시행되면서 기준에 맞지 않는 기존의 놀이터는 폐쇄해야 했다. 아이들의 놀 공간이 하나둘씩 사라지자, 세이브 더 칠드런 등과 같은 어린이 구호단체를 중심으로 ‘놀이터를 지켜라’는 캠페인이 시작됐다. ‘아이들에게 어떤 놀이터가 필요할까’라는 고민도 시작됐다. 동답초의 구령대 놀이터도 이 캠페인으로 지어졌다. 이를 디자인한 지정우·서민우 대표는 놀이터라는 말보다 어우러져 놀 수 있는 놀이풍경을 짓는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놀이터는 무엇일까요?”라고 물었더니 ‘신나게 뛰는 곳’이라고 답하는 아이가 드물었다. 휴식, 마음의 쉼터, 인생, 위로, 재미, 자유, 조금 위험한 곳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들이 놀이터를 명명하는 단어들의 의미는 명확했다. 서 대표는 “놀이기구의 집합이 아니라 공간으로써 놀이터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며 “공간으로 접근하면 세상에 똑같은 놀이터는 있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두 건축가는 건물을 짓듯 놀이터를 짓는다. 주변 환경을 분석하고, 건축주나 다름없는 아이들에게 어떤 놀이터가 필요한지 묻는다. 서울시 교육청의 꿈을 담은 놀이터 프로젝트로 지어진 동대문구 배봉초의 등굣길 놀이터도 그렇게 탄생했다. 배봉산 기슭에 있는 학교는 정문부터 학교 교실까지 온통 경사지였다. 아이들은 이구동성 말했다. “학교 오는 게 힘들어요.”

3, 4 배봉산 기슭에 있어 경사가 심한 배봉초에 맞춤형으로 제작한 놀이터. [사진 이유에스플러스건축]

3, 4 배봉산 기슭에 있어 경사가 심한 배봉초에 맞춤형으로 제작한 놀이터. [사진 이유에스플러스건축]

그래서 등굣길이 재밌도록, 놀이터를 지나 학교 안에 들어가게 했다. 놀이터가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현관 아래 계단까지 걸쳐져 있다. 아이들은 언덕 위 학교 교실에 들어설 때 기존처럼 계단을 오르거나, 이 놀이터의 그물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가 들어가기도 한다. 지 대표는 “교실에서 운동장까지도 멀어서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놀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 학교 교실과 가깝게 놀이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배봉초의 새 놀이터는 학교의 지형을 고려한 맞춤형 놀이 처방전이자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놀이 공간인 셈이다.

하지만 다른 놀이터를 짓는 일은 녹록치 않다. 시스템부터 달라져야 한다. 서 대표는 “아이 하나 키우는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고 하듯 놀이터를 바꾸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놀이터는 짓고 나서 행정안전부가 위탁하는 안전검사기관에 검사를 받아야 한다. 주로 놀이기구에 초점을 맞춰 납·카드뮴 등과 같은 성분 검출 검사를 하는 탓에 새로운 재료를 쓰기 어렵다. 결국 기존에 제품 인증을 받은 플라스틱이나 나무로 만든 놀이기구를 갖다 설치하게 된다. 벽돌이나 콘크리트로 놀이 공간을 만들 수 없다. 무엇보다 완공 후 검사해 합격·불합격 판정을 하니 시공사도 새로운 시도를 하길 꺼린다. 지 대표는 “새로운 놀이 집을 만드는데 싱크대 수도꼭지 기준으로 그 집을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동네별로 놀이터의 편차가 크다. 행안부에 따르면 전국에 약 7만7000개, 서울에는 1만여 개의 놀이터가 있다. 서울 놀이터의 상당수는 70~80년대 택지개발 지구에 집중돼 있다. 당시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새로 조성되는 택지지구에서는 250m마다 어린이 공원을 만들게 했다. 이에 따라 자치구별 격차가 심하다. 24개 자치구 중 중·종로구가 놀이터 155개로 꼴찌다. 1위는 노원구(723개), 2위는 강남구(660개)다. 아파트 단지가 많은 구일수록 놀이터가 많다.

놀이터는 도시와 닮았다. 도시의 밀도가 높으면 놀이터의 밀도도 높다. 아이들에게 놀 땅을 내줄 여유가 없으니 그렇다. 한국에서 공간을 만들어 주기보다 놀이기구 중심으로 놀이터가 발전한 또 다른 이유다. 놀이터 전문가인 김연금 조경가(조경작업소 울 소장)는 “조그만 놀이터에 모든 연령층이 놀 수 있게 만들어야 하니 어떤 연령대도 행복하지 않은 놀이터가 만들어지곤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모든 아이가 행복하게 놀 수 있는 놀이터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김 소장은 “아이들을 놀이터에서 끄집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도시가 어른을 위한 도시로 발전하면서 아이들을 놀이터와 학교에 가뒀다는 지적이다. 아이들을 놀이터 밖으로 꺼내려면 어른을 위한 도시가 아이들을 위한 도시로 패러다임부터 전환해야 한다. 이미 해외 여러 도시에서는 놀이터의 개념을 도시 전체로 확장하고 있다. 1989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아동 친화 도시의 기초가 됐다. 국내에서도 이런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이들의 활동을 독려하기보다 보호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많다.

강남구보다 노원구에 놀이터 많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시가 보도 폭을 확보해 만든 놀이공간. 길을 걷 다보면 난데없이 이런 놀이터가 나온다. [사진 carve]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시가 보도 폭을 확보해 만든 놀이공간. 길을 걷 다보면 난데없이 이런 놀이터가 나온다. [사진 carve]

2019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3기 신도시를 아동 친화적인 도시를 만들겠다며 연구용역을 냈다. 이를 맡은 김 소장은 ‘아동 놀이 행태를 고려한 도시 공간 조성방안 연구’를 진행했다. 아이들이 어디에나 갈 수 있고, 어디서나 놀 수 있는 도시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이를 위해 해외 도시를 둘러본 김 소장은 “네덜란드 로테르담, 암스테르담의 경우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놀이터가 튀어나온다”고 전했다. 로테르담시가 2007년 발표한 ‘아동 친화적인 로테르담을 위한 빌딩 블록’이라는 도시계획 비전에 따른 결과다. 15만㎡ 규모의 블록을 지정하고 그 바깥은 시속 50㎞로 차량 속도를 제한한 뒤 블록 안에는 중심 놀이터(5000㎡ 이상), 중간 놀이터(1000㎡ 이상), 길마다 놀이보도를 만들었다.

난데없이 나오는 놀이터는 이 놀이보도다. 도로 한 쪽에 최소 3~5m가량 폭을 확보해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혼자 다닐 수 있게 안전한 가로환경을 만들면서 놀 공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김 소장은 “도시가 아이들에게 ‘너희의 도시다’, ‘너희가 놀아도 되는 도시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는 모두를 위한 놀이터로도 확장되고 있다. 일본의 소도시 텐리의 전철역 앞에는 이런 놀이터가 있다. ‘코푸펀(Cofufun)’이라는 이름의 놀이터로  디자인 그룹 넨도가 디자인했다.

광장 곳곳에 비슷비슷한 하얀색 계단식 원추형 공간이 있는데 각각의 쓰임새가 다르다. 테이블이 되기도, 아이들이 뛰어노는 트램펄린이 되기도 한다. 지 대표는 “논다는 행위가 꼭 무언가를 타거나 미끄러져 내려오는 놀이터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걸터앉아 쉴 수 있고 간식도 먹을 수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한 장소, 우리의 놀이 공간도 적극적인 시민 공간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강조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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