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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타락한 영혼이 유해산업 보호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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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9호 21면

로비스트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세뇌하는가

로비스트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세뇌하는가

로비스트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세뇌하는가
스테판 오렐 지음
이나래 옮김
돌배나무

‘돈세탁’이란 말은 많이 들은 것 같은데 ‘과학세탁’은 무엇일까. 내분비계(호르몬계) 교란물질은 남성 생식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과학계에서 거의 입증됐다. 2013년 유럽위원회 환경총국은 내분비계 교란물질 규제안을 제출해 승인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물질과 관련이 깊은 농약 제조업체들은 규제안에 거세게 반대하며 유예기간을 최대한 얻어 내려 애썼다. 여기에 동원된 게 과학이었다.

56명의 과학자 집단이 당국에 “(규제의) 필요성을 증명할 적절한 과학적 증거도 없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는데 이를 14종의 학술지가 동시 사설로 공개했다. ‘과학적 근거 없는 예방조치가 유럽위원회 내분비계 교란물질 규제에 대한 권고사항에 힘을 불어넣고 충분히 정립된 과학상식과 위해성 평가 원칙을 무시한다’는 제목을 달았다.

그런데 사설 공저자 18명 중 17명이 살충제, 의약품, 화장품 또는 생물공학처럼 많든 적든 간에 규제안의 위협을 받는 업계의 기업과 관련이 있었다. 다수는 규제원칙의 정당성에 언제나 신속하게 대항하는 담배산업에 협력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학술지의 공동사설엔 이해관계 확인서는 첨부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그린피스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EU의 공동농업정책(CAP) 회의를 앞두고 다국적 생화학업체 몬산토를 성토하는 모습. 몬산토는 유해 제품 생산과 관련해 수많은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린 바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해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그린피스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EU의 공동농업정책(CAP) 회의를 앞두고 다국적 생화학업체 몬산토를 성토하는 모습. 몬산토는 유해 제품 생산과 관련해 수많은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린 바 있다. [AFP=연합뉴스]

학술지를 이용해 신뢰를 한 땀 한 땀 만들어 내고 자기 인용을 거듭해 신뢰의 고리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과학 세탁의 목적이다. 불편한 진실을 감추려는 쾌속 부정 세탁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로비스트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세뇌하는가』는 프랑스 르 몽드 기자인 지은이 스테판 오렐이 10년 이상 추적했던 과학 조작, 이해 충돌, 기업 로비와 관련된 취재 내용을 집대성한 책이다. 내분비계 교란물질을 비롯해 담배·농약·설탕·탄산음료·석면·벤젠·납 등 각종 논란 제품이 기업, 과학자, 공권력의 삼각 역학관계 속에 교묘하게 방어막을 뚫어 온 과정을 정밀하게 그리고 샅샅이 파헤쳤다. 물론 과학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는 분명 영리 추구를 위해 과학을 도구로 전락시킨 ‘청부 과학자’로 버젓이 활동하고 있음을 이 책은 고발했다.

지은이 오렐은 동료 스테판 푸카르와 함께 몬산토 페이퍼라고 불리는 몬산토사의 비공개 내부 문서를 토대로 탐사보도를 해 2018년 유럽언론상 조사보도상을 수상했다. 몬산토사는 유전자 독성을 갖고 있어 DNA를 손상할 수 있는 글리포세이트와 계면활성제를 사용한 베스트셀러 농약 ‘라운드업’ 판매 규제를 막기 위해 사내 인사를 유령필자로 동원해 명의를 대여받은 과학자의 이름으로 논문을 발표한 사실이 드러났다.

유해제품 생산 기업들은 끊임없이 저지선을 구축하고 과학적 입증에 의문의 씨앗을 뿌리는 교란작전을 펼치기 위해 주로 과학 컨설턴트들이 모여 있는 제품방어사무소의 힘을 빌리곤 한다. 악마의 재능을 지닌 한 미국인 마케팅 전문가의 영향으로 폐암 유발과 관계있는 담배산업은 의심을 양산하는 공장으로, 지식을 파괴하는 기계로, 무지를 생산하는 설비로 변모했다. 충치균을 증식시키는 설탕은 섭취량 제한이라는 예방보다는 사후 치아 치료를 더 중시하는 쪽으로 관용을 받았다. 폐에 치명적인 발암물질 크롬을 규제하려는 시도도 지연됐다. DNA 손상 위험을 안고 있는 제초제의 경우도 그랬다.

한국에서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등 유사 사례가 많았다. 이 책에서 본 것처럼 감시와 고발이 많아질수록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과학자들 모두에게 양심선언을 요구할 수도 없고. 아무튼 한국에서도 흑막을 밝히는 성과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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