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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잔칫날 먹던 삶은 돼지고기…‘도감’의 손맛 살아 있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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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9호 24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제주 옛날 도마에 차린 돔베고기.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장 외가에서 4대 이상(120년 안팎) 물려 써 온 도마로, 가로 60㎝ 세로 40㎝ 상판에 30㎝ 정도의 다리를 달았다. [사진 이택희]

제주 옛날 도마에 차린 돔베고기.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장 외가에서 4대 이상(120년 안팎) 물려 써 온 도마로, 가로 60㎝ 세로 40㎝ 상판에 30㎝ 정도의 다리를 달았다. [사진 이택희]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 제주에는 독특한 돼지고기 음식문화가 있다. ‘돔베고기’와 ‘괴기반’이라는 제주어에 문화적 지층이 쌓여 있다.

돼지고기 수육 전문점 ‘제주도감’ #따로 삶은 여섯 부위 따뜻한 수육 #돔베에 올려 이색 소스 찍어 먹어 #혼례 날 신부상에 올린 접짝뼈국 #메밀간장기름국수·돼지설렁탕도

돔베고기는 삶은 고기를 썰어서 돔베(도마)에서 바로 따뜻하게 먹는 제주식 돼지 수육이다. 제사나 차례에 쓰려고 돼지고기를 구해 오면 필요한 분량을 보관(된장에 박아 두면 쉬 상하지 않고 2~3주 가능했다고)해 두면서 자투리 고기를 삶아 즉석에서 썰어 먹던 데서 유래했다. 마을 잔치나 초상 때 음식을 총괄하는 ‘도감(都監)’이 돼지고기를 준비하면서 시식을 겸해 자신의 돔베에 여러 부위를 썰어 맛보는 것도 돔베고기다. 고기는 멜젓이나 된장, 쉰다리로 만든 식초가 들어간 제주 초간장에 찍어 먹었다. 멜젓은 봄철 제주 앞바다 대멸치로 담근 젓갈이고 쉰다리는 쉰 밥으로 만드는 술이다. 제주에는 젓새우가 안 나서 새우젓이 없었다.

괴기반은 잔치나 초상 치를 때 하객·문상객 접대상에 올리는 고기 접시다. 제주 잔치는 돼지를 잡는 일로 시작한다. 잡은 돼지는 ‘도새기 열두 빼(배)’라 하여 12도체로 분할하고 부위마다 따로 삶는다. 12도체는 대가리, 아리굴탁(턱살), 휘양도래기(돼지 아랫입술 포함한 목살), 전각 2개, 갈리(갈비) 2개, 일룬(아랫 배받이), 후각 2개, 비피(등심 끝~꼬리 사이), 숭(가슴살=삼겹살) 등이다.

도감이 음식 소외되는 사람 없게 배분

돔베고기 ‘큰 도감’은 돼지고기 여섯 부위를 따로 삶은 따뜻한 수육과 5가지 소스로 구성된다. [사진 이택희]

돔베고기 ‘큰 도감’은 돼지고기 여섯 부위를 따로 삶은 따뜻한 수육과 5가지 소스로 구성된다. [사진 이택희]

돼지 잡는 것부터 음식 장만과 손님상 차리기까지 전반을 마을 ‘도감(都監)’이 관장한다. 마을마다 자연스럽게 추대된, 경험 많고 솜씨 좋은 어른이 있어 잔치 때마다 당연직으로 맡는 ‘총괄셰프’다. 특히 돼지고기에 관한 권한은 잔치 주인보다 한길 위다. 도감의 가장 중요한 일은 준비한 음식을 하객의 수에 맞춰 균등하고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배분하는 것이다. 등에 업혀 온 아기나 팔순 할머니나 똑같이 한 상을 받고, 현장에 동참하지 못한 마을 사람 몫도 챙긴다. 음식문화에 담긴 제주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이다.

12도체는 도감의 지휘에 따라 부위별로 특성에 맞게 따로 삶는다. 삶는 방법에 따라 고기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뜸들이는 시간을 조절하고, 삶은 고기를 건져 소금과 식초를 탄 찬물을 끼얹어 밑간과 소독을 한다. 표면 열기를 빨리 식혀 육즙이 겉으로 흐르는 걸 줄이는 효과도 있다. 찬물을 끼얹어도 내열은 천천히 식는다. 그러면 고기가 빨리 마르지 않아 촉촉한 질감과 맛이 살아 있다. 이 고기를 식혀서 괴기반을 차린다. 삶는 물에는 돼지 한 마리에 된장만 두 숟갈 정도 푼다.

종일 고기를 삶은 국물은 진국이 된다. 여기에 다진 돼지 내장, 몸(모자반)을 넣고 밤새 끓이면 ‘몸국’이 된다. 국물에 메밀가루를 걸쭉하게 풀고 잘게 썬 신김치를 양념장으로 올려 상에 낸다.

‘제주도감’ 양용진 원장.

‘제주도감’ 양용진 원장.

손님상은 밥, 괴기반, 몸국, 잡채, 나물, 김치 정도를 독상으로 차린다. 괴기반에는 돼지 수육 석 점, 수애(순대) 한 점, 마른 둠비(단단하게 굳힌 두부) 한 점이 올라간다. 고기는 수직으로 썰지 않고, 포를 뜨듯 얇고 넓게 비스듬히 자른다. 같은 양의 고기로 접시가 더 풍성해 보이도록 하려는 도감들의 방법인데, 단면적이 넓어지니까 고기 한 점에 껍질·비계·살이 고루 들어가 맛도 씹는 질감도 더 다채롭다.

돔베고기와 괴기반으로 정착한 제주의 돼지고기 음식문화는 이 화산섬에서 돼지를 사육한 이래 오래도록 쌓이고 다져진 방식일 터이다. 이 뿌리 깊은 전통도 이제는 잊혀지거나 변형돼 아주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다. 기름기를 선호하는 식성의 변화, 불로 직접 가열해 기름 맛을 극대화하는 조리법의 압도적 확산 때문이다. 그 결과 돼지고기 소비는 부위와 조리법이 삼겹살 구이 쪽으로 극단적 편향이 심해지고 있다.

이런 대세에 맞서 전통 제주 방식의 돼지고기 음식을 파는 음식점이 두 달 전 제주시에서 문을 열었다. 상호가 ‘제주도감’이다. 제주 전통사회 ‘도감’들의 솜씨와 정신을 되살려 ‘제주 돼지고기를 가장 제주답게 맛볼 수 있는’ 집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은 작명이다. 이를 위해 제주 향토음식 명인 1호인 어머니 김지순(85) 여사를 도와 ‘낭푼밥상’을 운영하는 양용진(56)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장이 요리를 맡고, 돼지 1만2000두를 사육하면서 가공·유통까지 하는 만덕유통이 고기와 자본을 대고, 165.3㏊(50만 평) 넘는 메밀 농사를 짓는 농업회사법인 ‘오라’가 메밀을 공급한다. 여기에 20대 여성들로 구성된 마케팅과 외식업 경영 전문회사 ‘비바리즈’가 힘을 모았다.

제주에서 혼례 때 신부에게 끓여 주던 접짝뼈국.

제주에서 혼례 때 신부에게 끓여 주던 접짝뼈국.

메뉴는 ▶도감(돔베고기, 3만~4만5000원) ▶접짝뼈국(1만원) ▶메밀간장기름국수(9000원)와 세 가지 모둠 차림인 ▶도감세트 한 상(6만2000원)도 있다. 여기에 돼지설렁탕을 곧 추가한다.

돼지설렁탕.

돼지설렁탕.

돔베고기는 1년 자연 건조한 참나무로 양 원장이 만든 돔베에 오겹살·항정살·뽈살·전지·갈비·덜미살(꼬들살) 등 여섯 부위 따뜻한 수육을 차린다. 양념은 세우리(부추)와사비, 메밀소금, 뿔소라강된장, 갈치속젓, 제주 초간장이 나오고 제주 보리를 삶아 넣은 얼갈이보리김치와 계절 장아찌도 곁들인다. 부위마다 다른, 다양한 고기 맛을 한꺼번에 즐기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양용진 원장 “솖은 돗괴기 먹으래 옵서”

접짝뼈국은 혼례 날 신부상에만 올려주던 국이다. 앞다리 사이의 가슴뼈를 제주 말로 접짝뼈(또는 우대갈비)라 하는데, 1~3번 갈빗대를 포함해 자른다. 쇄골 아래 붙어있어 짧고 두 손바닥만큼 나오는 부위다. 족두리 쓰고 혼례복 입은 신부가 뼈를 들고 뜯을 수는 없으니 수저로 떠먹을 수 있는 길이로 자르고, 도톰하게 썬 무를 넣어 고기가 무르도록 끓이다가 마지막에 메밀가루를 풀어 국물이 걸쭉하게 한다. 느끼하거나 끈적일 것 같은데 실제는 시원하고 부드럽다.

제주 메밀 간장기름비빔국수.

제주 메밀 간장기름비빔국수.

메밀간장기름국수는 메밀쌀을 매장에서 맷돌로 갈아 국수를 뽑는다. 메밀 100%로 하려 했으나 손님들 반응을 반영해 고구마 전분을 15% 혼합한 85% 메밀면이다. 제주 메밀은 찰기가 덜한데 국수가 제법 차졌다. 비빔기름은 콩기름에 여러 채소를 넣고 약한 불로 오래 끓여 제주 고춧가루를 다시 넣고 우린다. 맛간장은 양조간장에 채소·과일과 곡물가루 한 가지를 넣고 달여 만든다. 일제강점기에 신식교육을 받은 할머니가 어린 양 원장에게 자주 해 주던, 뒷맛 달금한 왜간장과 참기름 비빔국수의 추억을 되살린 뉴트로 음식이다.

돼지설렁탕은 서울의 ‘옥동식’이나 ‘광화문국밥’의 맑은 돼지국밥을 보면서 양 원장이 오래 생각해 온, 돼지고기로 서울식 설렁탕처럼 끓이는 음식을 세상에 처음 내놓는 메뉴다. 뽀얀 국물 색이나 맛이 소고기 설렁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질이 같은 고깃국이라 맛이 비슷할 거라는 게 양 원장 생각이다. 선입감과 달리 잡내가 거의 없다. 맛이 깔끔하고 감칠맛은 좋다. 뼈와 고기의 신선도가 비법이라 한다. 그런데 돼지 대가리 뼈가 안 들어가면 국물 맛이 제대로 나오지 않더란다.

양 원장에게 요즘 마음속 말을 제주어로 해 보라 했다. “제주 사름덜 잔치 때 먹어난 솖은 돗괴기 먹으래 옵서”라 한다. ‘제주 사람들 잔치 때 먹던 삶은 돼지고기 맛 좀 보세요’라는 말이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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