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수익률 167% 내더니…편의점서 4억 개 팔리는 아이템은?

중앙선데이

입력 2021.06.05 00:02

업데이트 2021.06.05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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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9호 02면

애초에 장사가 잘됐다. 3분의 2를 날리고 남은 3분의 1만 건져 팔아도 수익률 167%를 챙겼다. 주식이냐 펀드냐 부동산이냐. 아니다. 얼음 얘기다.

지난 6월 1일 오후 경북 포항수협 직원이 이곳 제빙공장에서 만든 얼음을 살펴보고 있다. 김현동 기자

지난 6월 1일 오후 경북 포항수협 직원이 이곳 제빙공장에서 만든 얼음을 살펴보고 있다. 김현동 기자

얼음의 과거
장빙업자, 한강 얼음 저장해 판매
3분의 2 녹아도 남는 수익 막대
왕족 장례용품·하사품서 상품화

얼음의 현재
컵얼음, 편의점 판매량 1위 다퉈
수산시장·빙수업계도 대량 비축
겨울에 아이스 커피 ‘얼죽아’도

5일은 모내기가 적당하다는 망종(芒種). 벼 잎의 푸름을 보태려 해의 이글거림은 더할 테다. 당장 6월 둘째 주인 다음 주 예보는 낮 최고 33도의 기온을 보여준다. 수산시장, 편의점, 빙수 가게 등 얼음에 울고 웃는 업계가 비상 상황에 돌입했다.

조선의 문신 장유(1587~1638)가 ‘여름에 제조되면 요술’이라고 읊은 게 이 얼음이다. 그런데 400년이 지나 정수기로도 뚝딱 만든다. 장유는 ‘빙부(氷賦)’라는 이 시 바로 다음 구절에 이렇게 읊었다. ‘겨울에 없는 것은 재앙’이라고. 400년 동안 대체 뭔 일이 있었을까.

# ‘얼음이 없었다.’
태조 6년 12월 29일의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간략하게 적지만 간단하게 볼일이 아니었다. 고동환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음력 11월과 12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는 걸 당시 재이(災異·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로 여겼다"며 "군주를 향한 하늘의 꾸짖음이 바로 재이라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기반해, 유교를 표방한 조선에서는 바짝 긴장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남아있는 빙고는 석빙고만 6곳이다. 목조 빙고였던 동빙고와 서빙고 등은 남아있지 않다. 사진은 경북 안동 석빙고. [중앙 포토]

현재 남아있는 빙고는 석빙고만 6곳이다. 목조 빙고였던 동빙고와 서빙고 등은 남아있지 않다. 사진은 경북 안동 석빙고. [중앙 포토]

얼음이 얼지 않으면 왕은 신하의 상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죄수를 풀어주기도 했다. 이 태조 6년을 포함해 조선은 450년간(태조~철종) 총 26회의 무빙(無氷) 기록을 남겼다. 태종·세종·중종 때 각각 4회, 성종 때 3회다. 그런데 조선 후대로 갈수록 무빙 기록은 상대적으로 뜸해진다. 고 교수는 “조선사회에 실학이 퍼지면서 조선 전반기보다 천인감응설이 약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얼음은 권력이었다.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은 개인 얼음 창고(사빙고·私氷庫)를 한강 변에 마련했다.

얼음은 장례용품이었다. 상(喪)치레가 긴 왕족·사대부가 죽으면 시신 부패를 늦추기 위해 사용했다. 이를 빙반(氷盤)이라 불렀는데, 시신 밑에 얼음판을 댔다.

얼음은 하사품이었다. 임금이 왕족, 신하들에게 나눠준 얼음을 반빙(頒氷)이라고 했다. 여름에 더위를 식혀줄 얼음을 하인이 줄을 서 받아갔다. 종이 없는 신하들은 받을 수 없었다. 그러자 ‘업자’들이 나섰다. 남아도는 ‘얼음 분양권’인 빙표(氷票)를 모아 거래했다. 일종의 ‘딱지’인 셈이었다.

이렇게, 얼음은 상품이 됐다. 18세기 후반 이후 한강의 얼음업자들은 겨울에 얼음을 쟁였다. 3분의 2가 녹아서 사라지고, 나머지 3분의 1을 돌아오는 여름에 팔았다. 그래도 남는 장사였다. 1908년 『한국수산지』는 당시 장빙(藏氷)업자들이 1500원(圓)을 투자해 15만관(貫)의 얼음을 저장했다가, 10만관은 녹아 없어지고 나머지 5만관을 1관당 8전씩 총 4000원(100전=1원)에 판매했다고 전한다. 매출 4000원에 비용 1500원. 순익은 2500원이니, 수익률 167%였다.

1900년대 초 한강에서 얼음톱과 집게 등을 이용해 얼음을 채취하고 있는 장면. [중앙 포토]

1900년대 초 한강에서 얼음톱과 집게 등을 이용해 얼음을 채취하고 있는 장면. [중앙 포토]

18세기 후반 한양에서 저장된 얼음은 관영 빙고인 동빙고·서빙고·내빙고(2곳) 등 4곳에 20만여 정, 빙계인(氷契人·얼음 독점권을 허가받은 무리)의 빙고 8곳에 100만여 정, 민간 장빙업자의 사빙고 30여 곳에 80여만 정 등 총 200만정에 달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한국 얼음 시장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894년 입국한 야마타(山田幸七)는 조선천연빙주식회사(朝鮮天然氷株式會社)를 세웠다. 우다노(羽田野茂八)는 1899년 한국에 들어와 과천군 흑석리에 빙고를 설치하고, 한 해 50만관 이상을 판매했다. 당시 시세를 따져 단순 계산하면 한 해 2만5000원의 순익을 거둔 셈. 서울시 자료에 의하면 1935년 쌀 80㎏은 17.8원이었으니,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중 겨울철 한강에서 채빙 광경을 담은 사진엽서. 왼쪽의 설명문에 “내지인(內地人, 일본인)에게는 진귀한 광경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일제강점기 중 겨울철 한강에서 채빙 광경을 담은 사진엽서. 왼쪽의 설명문에 “내지인(內地人, 일본인)에게는 진귀한 광경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오쓰보(大坪文吉)는 1895년 경성에서 벌인 잡화상이 망한 뒤 남대문시장에서 겨울에는 구운 떡을, 여름에는 얼음을 팔며 재기에 성공했다고 한다. 떡과 얼음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얼음 장사가 큰 영향을 미쳤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 “지난해 하루 판매량 최고치의 15배 양을 저장해 놓고 컵얼음(컵아이스) 수요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GS25 관계자의 말이다. 편의점 업계에서는 이미 봄부터 여름을 대비하고 있다. CU는 3월에 음료 500ml까지 담을 수 있는 ‘벤티’를 선보였다. 세븐일레븐은 4월에 큰 구슬형의 얼음이 하나 들어있는 ‘빅볼’과 대용량 ‘그란데’를 출시했다.

왼쪽부터 CU, GS25, 세븐일레븐의 컵얼음. 사진 각 사

왼쪽부터 CU, GS25, 세븐일레븐의 컵얼음. 사진 각 사

컵얼음은 편의점 판매 1위를 다투는 품목이다. CU에서는 최근 5년간 1위를 지키고 있다. GS25·세븐일레븐도 컵얼음이 원두커피와 엎치락뒤치락 정상 자리를 겨룬다. 편의점 컵얼음 시장은 최근 5년간 연평균 45% 성장했다. 편의점 3사의 지난해 컵얼음 판매량은 약 4억 1700만개.

쑥쑥 크는 컵얼음 시장.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쑥쑥 크는 컵얼음 시장.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CU 관계자는 “2013년 400억 원에 불과했던 컵얼음 시장 규모가 2020년 2300억원으로 확대됐고, 올해는 2400억원을 찍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세븐일레븐 관계자는 “컵얼음은 2030이 유난히 많이 찾는데, 커피나 파우치 음료 위주에서 최근 맥주까지 타 먹는 경향이 보인다”고 말했다.

수산시장에서도 6월부터 얼음 공급을 늘린다. 이 시기엔 3~4월 바닥을 찍은 어획량이 반등하고, 더위가 몰려오기 때문이다. 6월 얼음 생산량은 4월의 2배가량이다. 중앙일보 1979년 5월 23일자는 “수협중앙회는 올해 여름의 얼음 파동을 막기 위해 얼음 사전 비축제를 실시할 계획”이라 적을 정도다.

지난 6월 1일 오후 경북 포항수협 직원이 이곳 제빙공장에서 만든 얼음을 옮기고 있다. 김현동 기자

지난 6월 1일 오후 경북 포항수협 직원이 이곳 제빙공장에서 만든 얼음을 옮기고 있다. 김현동 기자

지난 1일 포항 수협 제빙소. 바깥 기온은 30도를 넘보는데, 얼음 창고 안은 영하 1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 각 주문이요.” 한 직원의 외침에 다른 직원이 지게차에 얼음 세 덩이를 올려놨다. 이곳에서 ‘각’이라고 표현하지만, 각설탕·각얼음처럼 작은 게 아니다. 현재 수협 제빙소에서 만드는 얼음은 대부분 109(길이)×55(폭)×27(두께)㎝이다. 무게가 135㎏에 달한다. 100년 전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은 대부분 45×30×20㎝, 20㎏ 정도였다.

얼음은 지게차에서 컨베이어벨트로 자리를 옮기더니 굉음을 내며 수 백개로 갈라졌다. 곧이어 2층에서 1층으로 이어진 관을 타고는 손님이 대놓은 트럭 적재함으로 미끄러지듯 올라탔다. 이렇게 어민에게는 한 각 당 6000원, 일반 시민에게는 7000원에 팔린다.

이창언 포항 수협 과장은 “현재 이곳에서만 하루 200각을 생산하며 900각 안팎의 재고를 유지하는데, 겨울에 많이 만들어 놓고 여름 들어서는 출하량을 늘린다”고 밝혔다. '때에 맞게 저장하고 꺼내어 쓰니….' 장유의 시 ‘빙부’에는 이런 내용도 있으니, 현재와 어느 정도는 맞아 떨어지는 걸까.

# ‘땡그렁’
지난 3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스포츠센터. 30대 여성이 얼음정수기에서 컵에 얼음을 한가득 담아 커피를 마셨다. 그는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데, 난 얼죽아다”고 말했다. ‘얼죽아’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를 줄인 신조어다. 2030의 행태를 드러낸다.

얼음정수기는 2003년 청호나이스에서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집에서도 순식간에 얼음을 만드는 시대다. 1965년에야 냉동고가 붙은 국산 냉장고가 나왔으니, 격세지감이요 상전벽해다. 당시 금성에서 출시한 눈표냉장고(GR-120) 가격은 8만600원. 대졸자 초임이 1만1000원이었던 시절이다. 1975년 냉장고 보급률은 6.5%에 불과했다. 2013년 냉장고 보급률은 104%다.

빙수 시장도 커지고 있다. 최근 3년간 연 1000억원씩 늘고 있다. 2018년 3000억원, 2019년 4000억원, 2020년 5000억원 규모다. 전문점·제과점·호텔에서 해마다 수십 가지의 새로운 메뉴를 선보인다.

대전의 한 제과점에서 선보인 여름 한정 메뉴 ‘전설의 팥빙수.’ [중앙 포토]

대전의 한 제과점에서 선보인 여름 한정 메뉴 ‘전설의 팥빙수.’ [중앙 포토]

빙수는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들어왔다. 일본은 독일이 1870년대에 개발한 얼음 대량생산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빙수 바람이 불었다. 매일신보 1915년 8월 7일자는 서울에만 빙수 장수가 442명이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충무로2가·명동 일대인 일본인 거주지 본정(本町·혼마치)과 한국인이 주로 살던 종로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대부분 일본인이 장사했다. 1920년대 딸구물(딸기물)·파나나물(바나나물)이 인기였다(『별건곤』 1929년 8월호). 여직원을 둬 대박을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어린 여성을 고용하는 곳이 급격히 늘었다고도 한다.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는 “빙수 자체는 일본에서 들어왔지만, 한국식 빙수 문화의 가장 큰 차별성은 비빔밥처럼 각종 재료를 얹고 이를 섞어 먹는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조선 후기 얼음 산업이 발전하면서 육류와 육수의 유통이 원활해져 설렁탕·냉면도 성행했다"고 밝혔다.

고동환 교수는 “얼음은 조선 전기까지는 여름의 불같은 기운을 누그러뜨리며 음양을 조화시키는 수단이었지만, 조선 후기부터는 상당한 이윤을 낳는 산업으로 성격이 변했다”고 분석했다. 지금, 장유가 말한 ‘요술’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곧 진짜배기 여름이 온다. 얼음이 언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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