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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걸린 세계 최대 영어사전, 미치광이 살인자가 기여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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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탄생 비화를 다룬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감독 P.B. 셰므란). 멜 깁슨이 언어 달인 제임스 머리 교수를, 숀 펜이 살인죄를 저지른 천재 닥터 마이너를 연기했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세계 최대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탄생 비화를 다룬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감독 P.B. 셰므란). 멜 깁슨이 언어 달인 제임스 머리 교수를, 숀 펜이 살인죄를 저지른 천재 닥터 마이너를 연기했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매년 정기적으로 언론엔 “옥스퍼드 사전에 이런 신조어가 새로 등재됐다”는 기사가 실린다. 브렉시트(brexit), 제3의 성(third gender)처럼 정치‧사회적 변화를 담거나 코로나19 시대 풍습을 반영한 팔꿈치 인사(elbow bump) 같은 단어다. 한국어도 꽤 올라 있다. 김치(kimchi), 온돌(ondol), 재벌(chaebol) 등은 영어에 일대일 대응하는 단어가 없어 고유어로 수록됐다. 옥스퍼드대 출판부는 단어 하나가 사전 표제어에 등재되기 위해선 신문‧소설 등에서 최소 10년간 일반적으로 사용돼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있다.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이 조명한 #언어 달인 교수와 편집증 천재의 우정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40만 개 넘는 단어를 수록한 세계 최대, 최고 권위의 사전이다. 1857년 편찬이 시작된 뒤 1928년 초판 완성까지 71년이 걸렸다. 이 작업에 동원된 언어학자만 1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 2일 개봉한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감독 P.B. 셰므란)은 이 옥스퍼드 사전 탄생에 얽힌 비화를 다룬다. 국내에도 번역 출판된 베스트셀러 원작 『교수와 광인(The Professor and the Madman)』이 원작. 베테랑 배우 멜 깁슨과 숀 펜의 만남,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의상 고증이 관심을 끌지만 방대한 역사와 배경을 압축하느라 영화적 재미는 다소 부족할 수 있다. 그럼에도 원작이 그려낸 가장 흥미로운 ‘비밀’이 낱낱이 소개되는데 바로 사전 탄생에 미국 출신의 미치광이 살인자가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실은 이는 새로 밝혀진 사실은 아니다. 오히려 사전 초판이 완성되기도 전인 1915년 영국 잡지 ‘스트랜드’가 ‘미국인 살인범이 옥스퍼드 사전 집필을 도왔다’는 다소 자극적인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미국인 저널리스트가 쓴 이 기사는 ‘(옥스퍼드 인근의) 브로드무어 정신 이상 범죄자 수용소에 갇혀 있는 부유한 미국인 의사’가 사전 집필에 기여했고, 사전 편집인 제임스 머리 경은 17년 간 그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도 그의 신분을 몰랐다는 내용을 담았다. 게다가 이후 이 범죄자 이름이 W.C. 마이너란 게 이후 알려지면서 런던의 호사가들은 다시금 들썩였다. 1872년 런던 빈민가에서 애꿎은 사내에게 총알 네발을 갈겨 죽음에 이르게 한 망상증 환자, 그 마이너가 새로 나올 사전 편찬에 기여했다니!

세계 최대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탄생 비화를 다룬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감독 P.B. 셰므란). 멜 깁슨이 언어 달인 제임스 머리 교수를, 숀 펜이 살인죄를 저지른 천재 닥터 마이너를 연기했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세계 최대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탄생 비화를 다룬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감독 P.B. 셰므란). 멜 깁슨이 언어 달인 제임스 머리 교수를, 숀 펜이 살인죄를 저지른 천재 닥터 마이너를 연기했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는 머리(멜 깁슨)와 마이너(숀 펜)가 나중에 ‘극적 만남’을 하기까지 각자 어떤 삶을 살았나를 평행으로 비춘다. 머리는 1857년 시작된 사전 작업이 22년간 지지부진할 때 혜성처럼 나타나 책임 편집자가 된 사람. 어려서부터 수십개 언어에 능통하고 어원에 해박했던 그는 ‘가방 끈’이 길지 않아 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극적으로 발탁됐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 치하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 걸맞은 세계 공용 영어의 필요성을 느꼈다. 옥스퍼드대 출판부가 야심차게 기획한 새 사전의 편찬 방침은 1150년 이후의 영어를 모두 수록하고, 단어의 형태, 철자, 의미의 변천을 예문과 함께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 애초 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는 곧 불가능한 목표란 게 드러났다. 1879년 머리는 작업의 속도를 위해 어휘 예문을 모으는 작업에 일반 독자도 동참해달라는 호소문을 시중 유통 서적에 끼워 배포했다,

한편 마이너는 예일대 의과대를 졸업한 부유한 집안 출신의 야심가였다. 그는 젊은 혈기를 과시하며 남북전쟁 중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전쟁의 참상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은 것으로 알려진다. 군에서 이미 편집증을 보인 끝에 퇴역한 뒤 기분 전환을 위해 런던으로 건너갔지만 누군가에 쫓긴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문제의 살인을 저질렀다. 그나마 감옥 대신 정신 이상자 수용소에 갇혔고, 미국 정부가 주는 퇴역연금에 힘입어 다량의 책과 그림 도구를 사들이고 여기에 취미를 붙이고 살았다. 그러던 중(1880 내지 81년 즈음) 그가 입수한 새 책에 흥미로운 호소문이 끼어왔다. 마이너는 기꺼이 자원봉사 하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머리는 1차로 쏟아진 800여통의 편지에 수락 답신을 보내기에 바빠 자원봉사자의 신분 따윈 궁금해 할 여유가 없었다.

옥스퍼드 사전 집필에 기여한 마이너가 남긴 어휘 노트, 이른바 minor-slip(마이너가 보낸 단어 쪽지).

옥스퍼드 사전 집필에 기여한 마이너가 남긴 어휘 노트, 이른바 minor-slip(마이너가 보낸 단어 쪽지).

브로드무어 수용소에 갇혀 있던 닥터 마이너는 여러 소설과 책 속에서 어휘 용례를 찾아서 옥스퍼드 사전 팀에 전달했고 그 규모나 체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진은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의 한 장면.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브로드무어 수용소에 갇혀 있던 닥터 마이너는 여러 소설과 책 속에서 어휘 용례를 찾아서 옥스퍼드 사전 팀에 전달했고 그 규모나 체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진은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의 한 장면.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잘 묘사됐듯 마이너의 작업은 여느 자원봉사자들의 수준과 열정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일단 우수한 엘리트 출신인데다 그가 가진 건 시간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널리스트 사이먼 윈체스터가 쓴 원작에 따르면 마이너가 읽고 예문을 정리해준 책엔 여행과 역사서가 많았다고 한다. 갇힌 신세였던 그가 이런 책을 읽으며 갑갑함을 해소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사전 팀이 마이너에게 의뢰했던 첫 어휘는 ‘art’. 이 단어의 쓰임새를 담아 1885년 사전 팀에 처음 도착한 마이너의 노트는 입이 떡 벌어지는 규모는 물론 여느 봉사자를 압도하는 체계를 갖췄다. 이렇게 시작된 교류는 십수년간 지속됐다. 마이너 역시 사전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은 조현병 증세가 한결 가라앉는 듯 보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과연 언제 어떤 식으로 만났을까. 영화는 ‘스트랜드’ 기사가 묘사한 식의 ‘극적 만남’을 보여주지만 원작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남아있는 서한으로 볼 때 이들은 1891년쯤엔 조우했다. 머리는 수용소를 찾아간 첫 만남부터 호감을 가졌고 이후 수십 차례 방문해 어휘와 어원들에 관한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 말미에 일부 완성된 옥스퍼드 사전을 선사받은 마이너가 사전을 안고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사진은 현재도 전해진다. 사전 서문엔 마이너의 기여에 감사하는 머리의 인사말도 함께 한다. 머리가 1899년 언어학회 연설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마이너는 그 전 2년 간 1만2000개의 인용문을 보내줬다. “지난 17, 18년 동안 닥터 마이너가 기여한 바가 어찌나 큰지 지난 4세기 동안 쓰인 인용문은 그가 보내준 인용문만으로도 쉽게 충당될 수 있었다.”

1910년 브로드무어 수용소에서 풀려나기 직전 옥스퍼드 사전을 안고 찍은 윌리엄 마이너의 초상 사진.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1910년 브로드무어 수용소에서 풀려나기 직전 옥스퍼드 사전을 안고 찍은 윌리엄 마이너의 초상 사진.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옥스퍼드 사전 편찬 책임자로서 평생을 헌신한 제임스 머리 교수(앞줄 가운데)와 그의 팀원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옥스퍼드 사전 편찬 책임자로서 평생을 헌신한 제임스 머리 교수(앞줄 가운데)와 그의 팀원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는 극적 재미를 위해 마이너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등을 과장되게 묘사했지만, 그가 어느 즈음 자신의 성기를 자르는 자해 소동을 벌인 것도 사실이다. 마이너는 브로드무어 수용소에서 총 38년을 지낸 끝에 1910년 석방됐다. 그를 석방하되 미국으로 떠나 다시는 영국에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서에 서명한 이는 훗날 역사적 주인공이 되는 윈스턴 S. 처칠 당시 내무부 장관이다. 머리는 사전 편찬을 계속했지만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915년 눈을 감았다. ‘T’ 작업 중이었다. 미국에 돌아간 마이너는 1920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28년 초판이 나온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총 12권에 41만4825개 어휘를 정의했고 182만7306개 인용문이 사용됐다. 전체 활자의 길이는 285㎞에 달했다고 한다. 인쇄 기술 발명 이래 가장 기념비적 저작이었다고 원작자 윈체스터는 전한다. 2021년 3월 옥스퍼드 사전은 1400개의 신조어 및 기존 어휘의 새 용법을 추가했다. 이 중 ‘미투(me too)’에는 ‘나 또한’ 이라는 기존 뜻 외에 ‘성폭력을 폭로‧방지하는 세계적 운동’이라는 의미의 용례가 추가됐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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