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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금 조작하며 꿀빤다” 공공기관 내부자의 ‘삥땅’ 폭로

중앙일보

입력

공공기관의 공금 유용을 비판하는 내부 폭로가 나왔다. 김회룡 기자

공공기관의 공금 유용을 비판하는 내부 폭로가 나왔다. 김회룡 기자

정부기관에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 있다는 내부 폭로가 나왔다. 기관의 공금을 유용하는 ‘꼼수’는 진화하는데, 이를 걸러낼 장치가 부실해서다.

과기부 과학기술기획평가원 소속 A씨 #만연한 도덕적 해이 블라인드서 폭로

4일 직장인의 익명게시판 애플리케이션인 ‘블라인드’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관계자로 추정되는 A씨가 공금 유용 사례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특정 공공기관에서 이득 취하는 꿀팁’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세금이 정말 아깝다”며 “상사가 강요하고 (직장에) 만연한 이 꿀팁을 없애줬으면 한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A씨의 글에서 드러난 KISTEP 내부의 공금 유용 사례다.

① 수백만원어치 커피 샀는데 ‘문구점 영수증’  

규정상 대금 처리가 불가능한 물품을 살 때 편법으로 거래명세서를 조작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캡슐커피는 사무용품비로 처리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때 문구점에 캡슐커피를 ‘대리 구매’해 달라고 요청한 뒤, 문구점에서 이 대금을 포함한 영수증을 발급받는다는 얘기다.

그는 “최근 몇백만원어치의 캡슐커피를 (기관 비용으로) 구매해 양심에 찔렸다”며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 같은 꼼수 비용 처리에 대해 “(각 부서에서) 막내·담당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명세서 조작을 해봤을 것”이라며 이 같은 행위가 만성적으로 횡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② 회의엔 11명 참석, 실제론 3명이서 일식집

충청북도 진천음성혁신도시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신청사. [사진 KISTEP]

충청북도 진천음성혁신도시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신청사. [사진 KISTEP]

식사비 부풀리기 관행도 지적했다. KISTEP은 외부기관 전문가와 회의를 할 때 1인당 3만원 이내에서 식사비를 지출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참석 인원 제한은 없다. A씨는 참석자 수를 부풀려 식사비를 초과 지출하는 사례가 잦다고 폭로한다.

예컨대 외부 전문가 한 명과 자문회의를 한 뒤 회의록에 내부 직원 10명이 참석한 것으로 기재한다. 이러면 식사비로 11명분(33만원)을 쓸 수 있다. 그는 “회의록에는 이렇게 적어두고, 세 명이서 횟집에서 마음껏 비싼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행을 주기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대부분 양심껏(?) 월 1~4회 정도 (식사비 초과 지출을) 한다”면서도 “이를 악용하는 사람은 회의를 위한 회의가 아니라, 점심을 먹기 위한 회의를 한다”고 비난했다. 이어 “(연구)과제를 수행한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라며 “1인당 1만원 가량 식비를 축소하면 대한민국 연구활동비는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③ 꿀 먹은 벙어리여도 수당 30만원  

외부 전문가에게 지급하는 ‘전문가 수당’도 뜨거운 감자다. 전문가 수당은 회의에 참석한 외부기관 인력에게 지급하는 수당이다. KISTEP 규정에 따르면, 회당 최대 60만원 이내에서 지급할 수 있다. 최초 1시간에 20만원을 기준으로,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급 규모가 커진다.

여기에도 허점이 있다. 일단 해당 분야에 전문성이 부족한 지인이나 고교·대학 동창 등을 끼워넣는 행위다. 연구자들은 특성상 자신의 전공 분야별로 특정 대학이나 소속 학회 등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서로 자신이 소속된 기관의 회의에 부르는 ‘품앗이 방식’으로 전문가 활용비를 챙겨준다는 것이다.

A씨는 전문가 의견을 듣는 것이 실효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어떤 경우엔 고작 3분 참석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하다가 일어나도, 다음 회의에 다시 그를 부른다”며 “그래야 그가 속한 기관에서 전문가를 부를 때 선택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역시 워낙 만성적으로 퍼진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④ 아무리 삥땅 쳐도 징계는 솜방망이  

폐쇄형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공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는 글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KISTEP 재직을 인증했다. [사진 블라인드 캡쳐]

폐쇄형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공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는 글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KISTEP 재직을 인증했다. [사진 블라인드 캡쳐]

이 같은 공금 유용이 뿌리 뽑히지 않는 건 솜방망이 징계 때문이다. 부정 행위를 하다 적발돼도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A씨는 “얼마 전 한국과학창의재단 감사 자료를 확인했다”며 “성희롱·갑질·직장 내 괴롭힘이 만연했지만 서로 감싸주기에 급급했다”고 적었다. 간혹 비정규적 사원이 연루되면 “계약직은 내보내면 그뿐이라는 생각”이라며 “정규직은 잘 잘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KISTEP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했지만…  

이 같은 비리·부정 행위를 KISTEP도 조사하고 있다. KISTEP 관계자는 “국민 눈높이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면 엄정하게 조사해서 적발·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어 문구용품 구매 내역을 확인 중이라며 “의심 사례를 적발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밝혔다. 회의 참석자 부풀리기와 전문가수당 등에 대해선 “(식사비 과다 지출은) 지금은 상당히 개선됐다. (외부 전문가들은) 서면 등으로 회의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혁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는 “대기업에 비하면 공공기관은 상대적으로 도덕적 해이를 걸러낼 장치가 부실한 편”이라며 “최근 민간기업을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활동을 공공기관에도 도입하는 등 제도·문화 개선방안을 고민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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