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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에 의한 성범죄’ 처벌할 군법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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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선임 부사관에게 성추행당한 사실을 신고했으나 군이 오히려 은폐하려 하자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이모 중사 사건이 군내 성폭행의 추가 공개로 이어지고 있다. 이 중사 유족 측 김정환 변호사는 3일 국방부 검찰단에 공군 간부 3명을 직무유기·강요미수 등 혐의로 고소했다. 앞서 이 중사를 성추행한 박모 중사는 지난 2일 강제추행 치상 혐의로 구속됐다. 김 변호사는 “은폐의 중심에 있는 간부들을 추가 고소한다”며 “이 중사가 박모 중사 외에 최소 2명으로부터 또 다른 강제추행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성폭력 사각지대 대한민국 군 #만취 강요 회식문화가 성추행 온상 #공군 부사관 유족 “3명 추가 고소” #문 대통령 “가슴 아파, 엄정 수사를” #성추행 피해 사례 두 차례 더 공개 #1년 전 회식 타부대 부사관도 지목 #공군, 은폐의혹 간부 2명 보직해임

김 변호사에 따르면 추가 고소한 3명 중 2명은 사건이 일어난 지난 3월 이 중사가 차 안에서 성추행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간부들이다. 김 변호사는 이 중 한 명이 이 중사를 성추행한 것으로 지목했다. 공군은 이날 입장문에서 “해당 간부 2명은 3일 오후 보직을 해임했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가 고소한 또 다른 1명은 다른 부대 소속 부사관으로 1년 전 또 다른 회식 자리에서 이 중사를 성추행한 의혹을 받는다. 유족 측은 성추행 신고를 한 이 중사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취지로 회유한 간부가 1년 전에도 합의를 종용한 것으로 의심해 고소를 준비 중이다. 군 검찰은 고소장을 검토한 뒤 이들을 소환조사할 방침이다.

이처럼 군의 성폭력 사건이 속속 드러나자 문재인 대통령은 3일 “절망스러웠을 피해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며 엄정한 수사를 지시했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군 안팎에선 남성 중심의 군 문화와 법률·제도적 미비, 군 당국의 안이한 태도가 화를 키웠다는 비판이 거세다. 관계자들은 군내 회식 문화가 각종 성폭력 사건의 온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 이번 공군 여중사 사건에서도 성추행의 매개는 회식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군 관계자는 “군인정신 운운하면서 여군에게 작정하고 술을 먹이는 경우도 있다”며 “사건이 벌어진 뒤 신고하면 술 탓으로 돌린다”고 말했다.

공군중사 유족 측 “은폐 앞장선 간부도 추행한 적 있다”

성추행 피해 신고 후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여군 부사관 이모 중사의 유족 측 변호사들이 3일 서울 용산 국방부 검찰단에 고소장을 제출 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추행 피해 신고 후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여군 부사관 이모 중사의 유족 측 변호사들이 3일 서울 용산 국방부 검찰단에 고소장을 제출 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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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회식 관련 성폭력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군은 ‘특단의 대책’을 내놨지만 곧 철회하기 일쑤였다. 해군에선 성 군기 위반이 잇따르자 2014년 7월 회식 장소에 술을 마시지 않고 참관하는 장병을 두는 ‘회식 지킴이’ 제도를 운용했다. 그러나 제도 도입 뒤 오히려 성범죄가 늘자 유야무야됐다. 해군은 2016년 연말을 앞두고 ‘여군과는 저녁 회식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반발이 일자 철회했다.

군 형법의 허점도 있다. 민간 형법엔 ‘고용주 또는 상급자가 속임수나 지위, 권력으로 밑의 사람과 성관계를 맺을 경우 처벌’(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하는 조항이 있지만, 군 형법엔 없다. 국방부 법무관리관을 지낸 법무법인 로고스의 임천영 변호사는 “군은 계급에 따른 상하 위계질서가 엄격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위력·위계에 의한 성적 관계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며 “미군은 이 때문에 성별과 상관없이 상관이 지휘·감독 관계에 있는 부하와 성관계를 맺으면 군 형법 위반으로 규정한다”고 말했다.

성추행 혐의를 받는 장모 중사가 지난 2일 구속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으로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성추행 혐의를 받는 장모 중사가 지난 2일 구속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으로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군 형법 15장은 성폭행엔 5년 이상의 징역을, 강제추행엔 1년 이상의 징역을 각각 규정했다. 민간 형법의 동일 범죄 형량(성폭행 3년 이상, 강제추행 10년 이하)보다 엄격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국방부에서 받은 통계를 보면 2015년부터 2020년 6월까지 군 형사사건으로 입건된 성범죄 사건 총 4936건 중 기소는 2173건(44%)이었다. 같은 기간 성범죄 사건의 1심 선고 기준 실형 비율이 각각 육군 10.3%, 해군 10.5%, 공군 9.4%로 10건 중 1건꼴이다. 집행유예 비율은 각각 실형보다 3~5배 높다.

제도의 사각지대도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등이 발생하면 수사와 별개로 사업주가 직권 조사를 해야 하지만 군은 이 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남녀고용평등법의 모법이 근로기준법인데, 군인과 군무원은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 관계자는 “군인은 군인사법이나 각 군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민간 회사였다면 당장 대기발령이 나야 할 가해자들이 버젓이 보직을 계속 맡는 경우가 상당수다. 양욱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성폭력 사건과 관련한 규정이나 지침이 있어도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수사기관이 제대로 수사하지 못한다면 군 내부 감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고 짚었다.

‘성폭력 지침’ 비공개도 문제다. 군 관계자는 “국방부 성폭력 지침은 군사기밀은 아니지만, 내부 자료로 분류해 민간에 공개할 수 없다”며 “군인이라면 찾아볼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군대를 말한다』의 저자인 김진형 예비역 해군 소장은 “이번 사건에서 지휘관은 성추행 사건을 덮는 데 급급했다”며 “전형적인 군의 병폐 중 하나”라고 말했다. 김 예비역 소장은 “사건·사고의 발생에 대해 따지는 것보다는 사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심사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말했다. 군 관계자는 “군 지휘부는 사건·사고가 이슈화되면 부대 지휘관을 일단 보직 해임부터 하는 경향이 있다”며 “지휘관에겐 큰 부담이다 보니 축소하거나 감추려고 드는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군은 “지금도 제도가 없어 성범죄가 일어나는 게 아니며, 본질적인 문제는 일부 군 간부의 비뚤어진 성 인식”이라고 비판했다.

이철재·김상진·박용한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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