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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 끓인 돼지족탕, 섬진강이 빚은 다슬기 수제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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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일일오끼] 전남 구례

지리산과 섬진강의 고장, 전남 구례는 먹거리가 풍성하다. 산에서는 온갖 나물이 나고, 들에서는 품질 좋은 쌀과 밀이 자라고, 강에서는 다슬기와 은어가 잡힌다. 남도의 손맛과 넉넉한 인심이 더해져 어디서나 맛난 한 끼를 만날 수 있다.

지리산과 섬진강의 고장, 전남 구례는 먹거리가 풍성하다. 산에서는 온갖 나물이 나고, 들에서는 품질 좋은 쌀과 밀이 자라고, 강에서는 다슬기와 은어가 잡힌다. 남도의 손맛과 넉넉한 인심이 더해져 어디서나 맛난 한 끼를 만날 수 있다.

지리산이 굽어보고 섬진강이 휘감는 전남 구례는 궁벽한 산골이지만, 먹거리가 다채로운 고장이다. 인구는 2만7350명(2018년)으로 전남 22개 시·군 중에서 가장 적은데 어찌 그리 솜씨 좋은 요리꾼이 많은지 찾아간 식당마다 진미를 만날 수 있었다. 구례에서는 산채비빔밥이나 닭백숙만 먹고 오면 안 된다. 닭 육회, 돼지 족탕 같은 별식부터 국산 밀만 고집하는 빵집까지 만날 수 있는 곳이 구례다. 지난달 27~28일 늦봄의 각별한 미각 체험을 만끽하고 왔다.

산닭으로 요리한 육회·숯불구이 #산나물의 향연, 만원짜리 백반 #하루 말려 보들보들 가오리찜 #100% 우리밀 빵지순례 성지까지

주문 들어가야 닭 잡는 집

당골식당에서 맛본 닭 육회. 왼쪽부터 껍질과 모래주머니, 가슴살.

당골식당에서 맛본 닭 육회. 왼쪽부터 껍질과 모래주머니, 가슴살.

수도권에서 구례를 찾아가면 가장 먼저 닿는 곳이 북쪽 산동면이다. 샛노란 봄소식을 전해주는 산수유 마을이 있는 곳이다. 마을 깊은 곳, 지리산 성삼재 들머리인 당골에 닭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 몇 곳이 있다. 35년 내력을 자랑하는 ‘당골식당’을 찾았다.

주문이 들어가야 닭을 잡는다고 해서 미리 ‘산닭구이(6만원)’를 예약했다. 서너 명이 먹을 수 있는 코스 요리다. 애피타이저는 닭 육회. 가슴살과 모래주머니(닭똥집), 껍질이 한 주먹씩 나왔다. 기름소금에 조금씩 찍어 먹어봤다. 가슴살은 광어 회처럼 부드러웠고, 모래주머니와 껍질은 꼬들꼬들했다. 비린내는 전혀 안 났다.

닭구이는 양념치킨이나 닭갈비 같은 음식과 달리 닭고기 고유의 맛을 즐기는 음식이다.

닭구이는 양념치킨이나 닭갈비 같은 음식과 달리 닭고기 고유의 맛을 즐기는 음식이다.

이어 돼지갈비처럼 간장 양념에 버무린 닭고기를 숯불에 구웠다. 바짝 익힌 고기 한 점을 먹어봤다. 씹을수록 고소했다. 닭고기란 원래 이런 맛이구나 싶었다. 닭구이를 다 먹어갈 때 즈음, 닭 뼈 찜과 닭 녹두죽이 나왔다. 토종닭 특유의 구수한 맛이 돋보였다. 첫 끼니부터 제대로 보양한 기분이었다.

당골식당 김문섭(45) 사장은 100일 된 암탉만 고집한다. 그보다 어리면 먹을 게 없고 늙으면 살이 질겨져서다. 주중엔 하루 10마리, 주말엔 40마리를 잡는다. 산수유꽃이 만개할 때는 하루 70마리까지 잡는다. 김 사장은 초봄마다 골병이 든다고 한다.

1%만 아는 우리 밀의 맛

목월빵집은 100% 국산 밀을 고집한다. 쑥부쟁이, 제피 같은 식재료로 만든 이색 빵도 많다.

목월빵집은 100% 국산 밀을 고집한다. 쑥부쟁이, 제피 같은 식재료로 만든 이색 빵도 많다.

요즘 구례는 ‘빵지순례’ 명소로 통한다. 수십 년 역사를 자랑하는 빵집은 없어도 국산 밀과 지역 식재료를 활용해 화제가 된 ‘목월빵집’이 있어서다.

장종근(39) 대표가 빵을 시작한 사연이 흥미롭다. 독일 교환학생 시절, 그는 매일 빵을 먹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독일 빵 맛을 추억하며 취미 삼아 빵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빵을 배웠고 2016년 고향인 구례에 빵집을 열었다.

목월빵집은 100% 우리 밀만 쓴다. 호밀, 앉은뱅이밀, 고대밀 등을 적절히 섞어서 쓴다. 제피, 쑥부쟁이 같은 지역 식재료도 활용한다. 장 대표는 “우리 밀은 모양내기가 힘들지만, 맛과 풍미는 수입산에 뒤지지 않는다”며 “무엇보다 신선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인이 쌀 다음으로 많이 먹는 곡물이 밀이다. 그러나 국산 밀 자급률은 1% 수준이다. 1970년대 수입산에 밀려 고사했던 국산 밀을 1990년대 어렵게 되살렸지만, 여전히 우리는 수입 밀을 주식으로 먹는다. 90년대 우리 밀 복원 운동을 주도한 구례에 목월빵집이 존재하는 건 우연이 아닐 테다.

목월빵집의 빵 맛은 처음엔 심심했다. 그러나 씹을수록 고소하고 향긋했다. 많이 먹어도 더부룩하지 않았다. 여러 빵 중에서 쑥부쟁이 치아바타(4000원)가 인상적이었다. 들기름과 대추를 넣어서 친근한 맛이었다.

순면 이불 같은 가오리 살결

배도 꺼뜨릴 겸 섬진강 둑길을 걸었다. 굽이치는 강 뒤편으로 지리산 산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한데 강가의 나무가 죄 물살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수해의 흔적이다. 지난해 8월 사흘간 500㎜의 물 폭탄이 구례에 쏟아졌었다.

동아식당의 가오리찜과 돼지 족탕(아래 사진). 두 음식 모두 한 번 맛보면 반하는 터라 유독 단골이 많다.

동아식당의 가오리찜과 돼지 족탕(아래 사진). 두 음식 모두 한 번 맛보면 반하는 터라 유독 단골이 많다.

동아식당의 가오리찜(위 사진)과 돼지 족탕. 두 음식 모두 한 번 맛보면 반하는 터라 유독 단골이 많다.

동아식당의 가오리찜(위 사진)과 돼지 족탕. 두 음식 모두 한 번 맛보면 반하는 터라 유독 단골이 많다.

당시 구례읍 전체가 큰 피해를 봤다. 저녁에 찾은 ‘동아식당’도 마찬가지였다. 가게가 완전히 침수돼 한참 장사를 쉬었다. 그러나 동아식당이 술꾼의 아지트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이른 저녁부터 땀내 풍기는 사내들이 거나하게 취해 술잔을 부딪고 있었다. 동아식당의 명물 돼지 족탕과 가오리찜을 곁들이며.

예부터 구례에서는 장충동 스타일의 족발이 아니라 국물 자작한 족탕을 먹었다. 구례군 김인호 홍보팀장은 “고기가 귀하던 시절 족탕은 보양식이나 산후조리 음식으로 많이 먹었다”고 설명했다.

족탕(중 2만원, 대 3만원) 맛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콜라젠 덩어리 살을 우걱우걱 씹다가 청양고추를 넣은 국물을 떠먹으면 느끼함이 싹 가셨다. 가오리찜(중 2만5000원, 대 3만5000원) 맛도 각별했다. 생선 살이 순면 이불처럼 보들보들했다. 김길엽(74) 사장은 “족발은 집에서 3시간 삶아오고, 가오리는 하루 말린 걸 쓴다”며 “준비 과정이 번거로워 웬만한 식당에서 족탕은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

몰디브 바다 닮은 청록빛 육수

다슬기 수제비. 신선한 섬진강 다슬기로 육수를 내 국물이 파랗다.

다슬기 수제비. 신선한 섬진강 다슬기로 육수를 내 국물이 파랗다.

구례를 가면 다슬기 수제비 한 그릇을 꼭 먹는다. 강이나 하천을 낀 고장에서 다슬기탕은 흔하게 팔지만, 다슬기 수제비를 파는 곳은 많지 않다. 구례에서는 예부터 다슬기 수제비를 먹었다. 섬진강에 다슬기는 흔하고 쌀은 귀하던 시절, 다슬기 수제비는 든든하면서도 영양 넘치는 한 끼니였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과 붙어 있는 구례 토지면에 다슬기 수제비 전문 식당이 모여 있다. 28일 아침 ‘토지다슬기식당’을 가봤다. 이 식당의 수제비(8500원)는 국물 빛이 남달랐다. 몰디브 바다가 떠오르는 영롱한 청록빛이었다. 부추를 갈아 넣었다는 수제비 반죽 때문에 국물이 더 파래 보였다.

왕경순(58) 사장은 “수입산 다슬기를 쓸면 절대 이런 색이 안 나온다”고 강조했다. 토지다슬기식당은 왕 사장의 동생 왕상윤씨가 잡은 섬진강 다슬기만 쓴단다. 구례에서 섬진강 다슬기 어획 자격을 가진 사람은 왕씨를 포함해 10명뿐이다.

독특한 빛깔만큼 국물 맛이 돋보였다. 보기엔 맑았지만, 깊고 진한 다슬기 향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하루 전 반죽해서 숙성했다는 수제비는 야들야들해서 국수처럼 술술 넘어갔다. 왕 사장은 “다슬기도 제철이 있다”며 “산란철인 여름을 앞둔 4~6월 다슬기가 가장 맛있다”고 설명했다.

백반 시켰는데 반찬 20개가 쫙

내년이면 아흔살인 고익용씨는 구례 오일장의 살아있는 역사다. 70년 가까이 뻥튀기를 만들었다.

내년이면 아흔살인 고익용씨는 구례 오일장의 살아있는 역사다. 70년 가까이 뻥튀기를 만들었다.

아침을 먹고 구례읍 오일장을 둘러봤다. 대중가요 덕에 유명해진 건 이웃 마을 화개장터이지만 규모는 구례 오일장이 압도한다. 평균 5000~6000명이 방문하는데 벚꽃 시즌에는 1만5000명 이상이 찾는단다. 이날도 북적북적했다. 70년 가까이 시장을 지킨 고익용(89)씨가 건재하게 뻥튀기를 만드는 모습, 푸릇푸릇한 산나물을 사고파는 장 풍경이 정겨웠다.

화엄사 앞 지리산식당에서 먹은 산채 백반. 된장찌개까지 스무 가지 반찬이 나왔다.

화엄사 앞 지리산식당에서 먹은 산채 백반. 된장찌개까지 스무 가지 반찬이 나왔다.

마지막 식사를 위해 화엄사 쪽으로 향했다. 펜션과 식당이 모여 있는 화엄사 입구에 산채 정식을 잘하는 식당이 많다. 46년 역사의 ‘지리산식당’이 그중 하나다. 흙돼지구이·능이백숙 같은 메뉴도 있었지만 가장 대중적인 산채백반(1만원)을 시켰다. 된장찌개까지 20가지 반찬이 상을 가득 채웠다. 남도에서 백반을 먹으면 김치만 네댓 종이 나오곤 하는데 지리산식당은 아니었다. 김치는 배추김치 딱 하나였다. 대부분 산나물이었다. 고춧잎, 쑥부쟁이, 신선초 등 모든 나물이 싱그러운 봄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1만원에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게 황송했다.

지리산식당은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영업한다. 아침에는 전날 만들어둔 찬을 내주니 신선한 반찬을 맛보고 싶다면 점심에 찾는 게 좋다. 버섯 전골을 시키면 엄나무순장아찌, 곰취나물처럼 귀한 나물 두 종을 더 내준단다.

구례=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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